서울 마포대교 전망대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고가 발생해 구조대원들이 남성을 구조하고 있다(영등포소방서 제공)./뉴스1
2017년까지 2년에 걸쳐 관련 데이터베이스 구축·전문요원 양성 
지난 11년째 OECD 자살률 1위 불명예 잡을 정부 차원의 대책


(서울=뉴스1) 음상준 기자 = 보건당국이 심리부검체계를 구축하는 사업에 내년에만 10억원가량을 투입한다. 정부는 이 예산으로 지난 4월 문을 연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운영하는 한편 자살유가족에 대한 사례관리 등을 담당할 전문 수행기관을 모집해 지원하는데 쓰인다.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은 전문성을 갖춘 면담자가 자살 사망자의 유가족을 인터뷰하면서 생전 고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말한다. 고인이 사망하기전 일정기간에 어떤 심리적 행동 양상을 보였는지, 스트레스와 병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자살 원인을 추정한다. 

21일 복지부에 따르면 심리부검체계 구축 사업은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된다. 내년 예산은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운영할 1개 기관을 선정해 9억60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7년 사업은 전년도 사업 실적을 평가해 지속 여부를 결정하고 예산은 정부 사정에 따라 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는 내년 1월 4일까지 심리부검체계 구축에 참여할 기관을 모집할 예정이다. 심리부검을 수행할 전문기관은 정신보건시설이나 학교, 사회복지법인, 전문인력을 갖춘 비영리법인 등이 대상이다. 선정된 기관은 심리부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전문요원을 양성하는 등 한국형 조사체계를 구축하는 업무를 맡는다. 

정부 차원에서 심리부검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지난 2013년 1월부터다. 당시 부산시와 부산경찰청이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전국 최초로 심리부검을 시행했다. 

그 결과 부산시는 정신과 치료경험이 있거나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 40대 무직자 등을 대상으로 예방 교육을 강화하면 자살률을 낮추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자살은 경제·사회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직업 분포도에서는 무직이 전체 절반가량인 48.4%를 차지했다.

정부가 심리부검에 주목하는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1년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개선하려는 고육지책이다. 통계청의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고의적 자해 사망자(자살)는 총 1만3836명으로 전년대비 591명(-4.1%) 감소했다. 하루 37.9명꼴이다. 

또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지난해 27.3명으로 전년 28.5명보다 다소 줄었고, 2008년 26명 이후 6년만에 가장 적었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OECD 평균 12명(2013년 기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복지부는 "심리부검을 통해 발견한 자살유가족에 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자살률 감소를 위한) 지속적인 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신문]

변사사건처리부 한 장에 정리된 노인의 죽음은 냉정하리만큼 간단명료하다. 한 해 노인 3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에서 오늘도 또 다른 노인의 죽음은 늘 하던 방식대로 기록되고 정리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인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이 부끄럽다고 외치지만, 정작 무엇이 노인들을 벼랑 끝에 서게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 해 벼랑 끝에 서게 되는 노인이 3500명이나 되는 현실을 그리고자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은 심리·정신분석 전문가들과 함께 자살자에 대한 ‘심리적 부검’을 시도했다. 심리부검이란 자살자의 유서나 가족·동료와의 면담 자료 등을 수집해 자살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 전까지 노인이 거쳐 온 삶의 궤적을 좇아 ‘마음속 지도’를 그리기 위함이다.



높은 자살률로 고민이 많던 핀란드는 1980년대에 행했던 한 해 동안의 자살자 전원에 대한 심리부검을 통해 10년 새 자살률을 20% 포인트 넘게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걸음마 단계다.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전국 자살자 가족을 상대로 심리부검을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의 실적은 121건으로 많지 않다. 여기에는 죽음 앞에 침묵하는 문화 탓이 크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은 100여명의 노인 자살자 유가족 등을 만났지만 실제 심리부검을 허락한 것은 7가족뿐이었다.

이번 심리부검은 서울신문이 중앙심리부검센터에 의뢰해 한국형 심리부검 체크리스트인 ‘K-PAC 2.0’으로 진행됐으며, 유가족 면접은 임상심리 전문가가 진행하되 서울신문 취재진이 사례를 발굴하고 면접 과정에 모두 참관했다. 국내 언론이 다수의 노인 자살자를 대상으로 전문가 집단과 함께 심리부검을 진행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조사 결과는 복지부가 구축하고 있는 국가 심리부검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858~1917)

사연 없는 주검이 있을까.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례는 노인을 자살로 이끄는 공통된 키워드를 찾기 위해 중앙심리부검센터와 진행한 총 7건의 심리부검 중 대표적 사례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름이나 주소지 등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두 노인을 자살로 내몬 상황과 심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키워드별로 부산, 충남 등에서 진행한 노인 심리부검 98건에 대한 통계(숫자 표시)와 전문가의 해석(알파벳 표시)을 덧붙였다.



■스스로 세상 버린 두 노인… 그들의 심리를 읽다 

[주검1]

“안방에서 죽었어. 그라목손(ⓐ) 먹고. 여서 꼬꾸라졌는디…거긴 보기도 싫여.”

2개뿐인 앞니에 박유순(69·가명) 할머니의 발음은 샜지만 악몽 같았던 그날 하루의 기억은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다. 시부모 봉양으로 시작해 남편과 50년 이상을 함께한 흙담집(①)에서 남편 김희준(81·가명)씨는 지난 4월 중순 제초제(②)를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달이 난 건 7개월 전이다.



그날 아침 달라진 남편의 행동은 할머니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남의 농사일을 돕다 갈비뼈 골절(③)로 한 달여간 누워만 있던 할아버지(④)는 작심한 듯 성질을 부렸다. 밑도 끝도 없었다. 머리맡에 놓인 과도를 들고는 “문 닫고 나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 아저씨는 원래 나한테 군소리 안 하고 다정한디 그날은 이상혔어. 과일 깎아 먹으려고 놔둔 과도를 들고 눈에 불을 싸지르면서 갑자기 나한테 문 닫고 나가라고 하는 거여. 겁이 나 문 닫고 나와 마당서 나물 두 바가지를 씻고 문 열어 보니 제초제를 마시고 쓰러져 있더라구.”

빗속을 뚫고 시속 100㎞ 이상을 달리는 구급차가 마치 경운기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청주 병원을 거쳐 다시 천안의 대학병원으로 갔지만, 할아버지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불행이 다가온 건 지난 4월이다. 할아버지가 집 뒤 대나무 밭에 갔다 넘어져 갈비뼈 2대가 나갔다. 병원에 갔지만 계속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퇴원하고 며칠 후에 남의 삼밭 일을 도와준다며 경운기를 몰고 언덕배기를 오르는데 경운기가 넘어졌다. 다시 갈비뼈 3대가 나갔다. 의사는 “뼈가 다 붙은 뒤 퇴원하라”고 권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보름치 입원비로 내야 하는 90만원도 이미 노부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돈이었기 때문이다.

퇴원 후 할아버지는 끼니는 물론 화장실 가는 일조차 혼자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늘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할머니는 가끔 나오는 남의 밭일이나 공공근로를 하러갈 수밖에 없었다. 돈이 원수였다. 주변에서는 병간호하는 사람을 붙이든 당분간 요양원에 보내든 하라고 권했지만, 매달 40만원이 드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일을 나갔다.



“먹고살려면 계속 일을 나가야 하니까. 찌개 끓여놓고 조기새끼 가시 다 발라놓고 남의 밭에 쑥 뜯으러 갔어. 그러고는 일 다하고 집에 갔더니 온종일 우리 아저씨가 밥(ⓑ)도 못 먹고 누워 있는 거여. 지 혼자 일어나지를 못하니까 밥도 못 먹고 있더라구. 그렇게 밥 좋아하는 양반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할아버지 밥 떠먹여 주면서 그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그리고 하루 있다가 그렇게 됐어.”

지긋지긋한 가난은 대물림을 받았다. 그나마 젊을 때는 몸뚱이가 재산이었다. 머슴 일부터 남의 농사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다들 가난한 때라는 위안을 하며 평생 농사일을 했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희망도 있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쌀 7가마니 정도가 나오는 작은 땅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꿈도 잠시. 몇 년 전 아들의 빚을 갚느라 전답을 모두 날렸다. 할아버지는 몇 년간 ‘그 땅은 쳐다보기도 싫다’며 애먼 산을 돌아 빙 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 고단한 삶 속에서 3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것만도 대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년의 삶은 더 곤궁했다. 몇십만원이 전부인 통장 잔고는 늘 한 달을 못 버텼다. 할아버지가 팔순이 넘으면서 바깥 일은 거의 할머니의 몫이었다. 남의 밭에 일을 나가거나 공공근로를 해서 버는 돈은 20만~30만원 정도, 노령연금 등을 합쳐도 손에 쥐는 돈은 늘 50만~60만원(⑤)을 넘지 않았다. 땅 빌리는 데 드는 돈에 전기요금, 난방비, 약값, 식비, 부조금 등을 내면 남는 돈이라곤 몇만원 정도였다.



“한 2년 전에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아파서 드러누우면 스스로 죽어야지, 남한테 피해가 가기 전에… 치료비(⑥) 때문에 산 사람도 못 살게 할 순 없잖아’라고…. 그때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타박했는데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좀 했었나 봐.”

어려서부터 가난한 삶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점잖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시골 투전판에 낀다든지 바람을 피우는 일도, 그 흔한 주사 한번 부리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살아생전 집안에서는 큰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유품을 확인하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십년을 써 다 낡고 눅눅해진 남편의 지갑 속에 3만원이 찰싹 들러붙어 좀체 나올 줄을 몰랐다. 시어머니가 읽었던 성경책 등에선 몇 년을 모았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꼬깃꼬깃한 지폐 109만원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뒤늦게 발견한 할아버지의 쌈짓돈은 농협에 빌린 200만원을 스스로 갚아 보려는 마음인 듯했다.

가난한 부모는 3남매(ⓒ) 중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 배우고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 남들처럼 좋은 것 못 먹이고 부족하게 가르친 것이 항상 미안했다. “생활비 대주는 애들은 없지만, 명절 때는 와요. 자기들 애들 키우고 밥 먹고 살려면 부모까지 챙길 여유가 있나. 자기 쓸 돈도 없을 거야.”



할머니는 못내 후회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죽으려고 했나. 하도 이불을 걷어차서 3~4개월 전부터 이불을 따로따로 덮었거든. 근데 언젠가 ‘임자, 내 곁에 와서 자’(ⓓ) 이러는 거야. 그래서 ‘더운데 뭘 같이 자’라며 홱 돌아서서 잤지. 그리고는 사흘 뒤에 그렇게 됐어. 그런데 우리 아저씨 돌아가시고 3일장도 못 치렀어. 며칠 지나지도 않아 공공근로 시작했지. 눈물도 안 말랐지만 목구녕이 포도청이니 그래도 나가야지. 일 안 하면 돈 못 받잖우.”

[주검2]

“아버지는 평생 가난했어요. 그렇지만 한번도 열심히 일하시지 않은 적은 없었죠.”

이명자(44·여·가명)씨는 아버지 이영재(가명)씨의 정확한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매번 외워 보려 하지만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부친의 죽음은 그만큼 잊고 싶은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일흔일곱 되던 2011년 3월(⑦) 고향인 전남 XX군 시골집에서 숨졌다. 사인은 병사(病死). 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사망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자살이라고 여긴다. 마흔살 때 한번 자살하려고 했던 전력이 있었고 사촌형(ⓔ)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가족사에 아픔도 겪었던 아버지였다. 딸 이씨는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렇게 돌아가시면 남은 자식들이 평생 손가락질 당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병사로 위장하려고 굶는 방법을 택하신 것 같다”고 했다.



이씨가 남긴 전 재산은 현금 200만원. 갚지 못한 농협 대출금 수백만원을 생각하면 실제 유산은 빚밖에 없다. 가난은 촌로의 게으름 탓이었을까. 하지만 딸 이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부지런한 소작농(⑧)’이었다. 거둬들인 농작물의 절반은 땅주인에게 주고 남은 것의 절반은 자녀 5명에게 골고루 나눠 줬다. 그리고 남은 곡식을 팔아 푼돈을 벌었고 알뜰히 모았다. 선천성 난치병을 앓던 막내아들(ⓕ)이 있었기에 ‘아이가 먹고살 돈은 남기고 가야 한다’는 부채 의식에 더 악착같이 일했고, 또 모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전 재산 1800만원을 친척에게 사기당해 모두 잃고 막내는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면서 허사가 됐다.

아버지 이씨의 황혼녘에 남은 것이라고는 ‘자식을 앞세웠다’는 허망함, 그리고 가난뿐이었다. 노인성 우울증(⑨)이 찾아왔고 76세 되던 해에는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늙은 부정(父情)은 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아비마저 기대기에는 딸들의 삶이 이미 퍽퍽했다. 빈곤의 대물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사는 고향집에서 외롭게 앓았다. 뒤늦게 아버지의 투병 사실을 알아챈 딸은 지역 대학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지만 의사는 “어차피 돌아가실 분(ⓗ)인데 뭐하러 데려왔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음식과 물을 전혀 먹지 않았다. 어머니의 애타는 부탁과 만류에도 곡기를 끊었고 굶은 지 15일 만에 숨을 거뒀다.

빈곤한 노년은 늘 벼랑 끝에 서 있지만 내색할 수 없다. 가족들은 늙은 부모의 자살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이며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인은 오히려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드물며, 모든 연령대 중 자살을 가장 치밀하게 준비하는 세대”라고 말한다. 심리부검에 응했던 딸 이씨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먹먹하게 말했다. “유품 중 아버지 수첩이 있었는데 가족 생일과 제사만 적혀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을걷이(ⓘ)를 해 보내주실 만큼 가족만 위하다가 즐기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도대체 왜….”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유영규 팀장 whoami@seoul.co.kr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서울신문]

가난한 노인에게 한국은 버티기 힘든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이를 방증한다. 심리적 부검을 통해 사후(死後)에 취재원이 돼 준 노인들은 그들이 자살에 이르게 된 경로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빈곤+α’.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이 지난 10월 1일부터 11월 31일까지 보건복지부의 중앙심리부검센터와 직접 진행한 총 7건의 노인 자살자 심리부검 결과와 부산시·충청남도 등으로부터 받은 자살 유가족 심리면담 자료 98건 등을 분석해 얻은 노인 자살의 공식이다. 다수의 노인이 빈곤의 늪에 빠진 현실에서 불행히도 ‘α’는 다양하다. 지병 또는 갑작스러운 질병, 심리적 고립감, 가족과의 불화, 폭력과 학대 등이 이미 벼랑에 선 노인들의 등을 떠민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년층도 경쟁에서 이길 힘을 잃으면 떠나줘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각자도생’의 냉엄한 사회에서 끝내 버티지 못한 한국 노인들은 2시간 30분마다 1명씩(2014년 기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난에 허덕이다 끝내 잘못된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노인들의 사연을 통계와 사례로 살펴봤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을 자살로 내모는 주범은 ‘빈곤’이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노인(65세 이상)의 10.9%가 60세 이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된 이유로는 경제적 어려움(40.4%)을 가장 많이 꼽았고 ▲건강 24.4% ▲외로움 13.3% ▲부부·자녀·친구와의 갈등 및 단절 11.5% ▲배우자·친구 등의 사망 5.4% 순이었다. 특히 잘사는 노인보다 못사는 노인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다. 소득 하위 20%(연 소득 754만원 이하) 가구의 노인 중 자살을 생각해 본 비율이 16.5%인 데 반해 소득 상위 20%(연 소득 3426만원 초과) 가구의 노인은 절반인 8.3%에 그쳤다.




현대사에서 경기침체가 자살률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를 봐도 노인 자살과 빈곤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박지영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인 자살률이 크게 늘었다”며 “자살은 경제적 어려움 등 원인 상황이 불거지고 2~5년 뒤 급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인구 10만명당 노인 자살률은 1997년 30.3명이었지만 외환위기(1997~98년)로 경제 성장률이 곤두박질치고 나서 3년 뒤인 2001년 42.0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카드대란(2003년)의 여파 등이 겹치며 노인 자살률은 급증세를 보였고 2005년에는 80.3명에 달했다. 노인 자살률은 이후 잠시 감소세를 보였지만 미국발 금융위기(2008년)의 여파로 2010년에는 역대 최악인 81.9명까지 치솟았다.

자살 문제 전문가들은 “빈곤만으로는 노인 자살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빈곤에 추가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더해질 때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노인 자살을 부추기는 첫 번째 공범은 ‘병환’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수사한 60세 이상 자살자 4141명 중 육체적 질병 탓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난 건이 1824명(44.0%)으로 가장 많았다. ‘건강=돈’인 우리 사회에서 노환이 찾아오면 경제적 어려움은 증폭된다. 박 교수는 “노인들은 질병 탓에 겪는 통증보다 경제적 부담과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존재의 고민을 한층 심각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특히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가장’으로서 더욱 큰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남성 노인들은 건강 악화로 돈을 벌 수 없게 되면 자살하는 사례가 여성보다 더 많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은 심리적 어려움 등을 겉으로 드러내 해소하기 어렵고 자살 방법도 훨씬 과격해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다”고 말했다.

외로움과 심리적 고립감은 노인을 절벽 아래로 미는 두 번째 공범이다. 가족의 해체가 노인을 가난하게 또 외롭게 만든다. 국내 노인 인구 중 혼자 사는 비율은 2000년 16.0%였으나 이후 증가해 2010년 19.4%, 2015년 20.8%로 치솟았다.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독거노인 비율은 계속 늘어 2020년이면 21.6%에 이른다. 젊었을 때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대신 늙어서는 자녀에 의지해 살던 전통적 가족 복지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최 교수는 “지금 노인 세대는 늙은 부모를 봉양한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로부터 부양받지 못한 첫 번째 세대”라면서 “가족 부양 체계가 이 정도로 해체될 것으로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 심리적으로 대비 없이 노년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특히 고향을 홀로 지키며 사는 농촌 노인은 심리적 어려움에 취약하다. 김도윤 충남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 부센터장은 “충남의 농촌 지역에서 노인 자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경제적 어려움, 질병 문제에 관계 단절로 인한 고독감이 겹치면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전했다.

충남의 한 농촌 마을에서 3년 전 음독자살한 김신옥(82·여·가명)씨는 ‘가난’과 ‘관계 단절’의 이중고 속에 죽음에 내몰린 사례다. 아들 둘, 딸 둘을 뒀던 김씨는 재산의 대부분을 큰아들에게 증여한 뒤 다른 자녀들과 불화가 생겨 관계가 멀어졌다. 그나마 같은 지역에 살며 의지했던 큰딸마저 병으로 사망했고 이후 둘째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아들이 집을 담보로 빚을 지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다. 이웃과 왕래조차 없었던 그는 지역 보건소장에게 “죽고 싶다”고 자주 털어놨지만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자 결국에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이렇듯 노인에게 자녀는 ‘힘들어도 버티게 하는 존재’여야 하지만 때로는 자살 생각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노인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경제력을 잃으면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힘든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하는 일이 많다. 고선규 중앙심리부검센터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의 노인 중에는 짐이 된다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자식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살하는 일이 다른 나라보다 많다”고 말했다.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유영규 팀장 whoami@seoul.co.kr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그래픽 김예원 기자 yean811@seoul.co.kr








“나도 법의학자… 부검현장 지켜

과학수사시스템 말聯에 수출도”


“나는 원장이기 이전에 법의학자잖아요. 당연히 부검 현장을 지켜야죠.”

서중석(58·사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지난 2012년 원장에 취임한 이후 국정원 직원 자살사건, 중국 선원에 의한 해경 사망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직접 부검했다. 아직도 ‘서중석’이란 이름으로 감정서를 작성해 수사기관에 보낸다. 올해 7월 전주 지방행정연수원현장학습 버스 사고 당시, 직접 중국으로 출장 가 검안을 진행하고 현장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는 “국과수의 원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학문적 리더십’”이라며 “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하는 곳인 만큼 전문성과 현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야 수장으로서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원장은 원장 취임 이전부터 대표적인 ‘출동형 법의관’으로 유명했다. 사무실에 앉아 시신을 인계받아 부검하고 기계적으로 감정서를 적어 보내는 법의학이 아닌,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직접 검시와 검안을 하고 현장의 다양한 변수를 살펴보는 실무형 법의관이다. 이 때문에 올해부터는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법의관이 경찰과 함께 출동해 검시하는 24시간 검시시스템을 서울 서남부권을 중심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서 원장은 “현재는 법의관 인력이 부족해 세 명의 법의관이 희생하는 마음으로 24시간 검시시스템을 운영 중이지만, 2020년이 되면 사건 사고가 많은 대도시에서 부검의들의 현장검안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서 원장은 법의관 출신이지만 국과수의 다양한 부서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최근 범죄 해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디지털분석과는 서 원장 부임 전 3명의 인력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18명이 됐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국과수의 과학수사 시스템은 한류 열풍을 타고 있다. 지난해 말레이시아에 1억 원 규모의 국과수 시스템을 사상 처음 수출했다. 국과수는 개발도상국에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방식으로 320만 달러 규모의 스리랑카 디지털멀티미디어 과학수사센터 구축 사업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서 원장은 “형사사건에 국한돼 있던 국과수의 증거감정 업무를 확대해 민사감정까지 통합함으로써 보다 과학적이고 진실한 증거 감정을 제공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다영 기자 dayoung817@munhwa.com





[폴리뉴스 오현지 기자]'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를 통해 흥미로운 법의학 세계를 만난다. 문국진 명예교수는 미국에서의 경험담과 자신의 '법의탐적론'에 대해 말한다.

'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들 중 하나인 국내 제 1호 법의학자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난다.

20일 오전 7시 5분 방송되는 KBS 1TV '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문국진이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된다.

세계 법의학계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떠난 문국진 박사는 대활약을 펼쳤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문국진의 끝나지 않은 활약이 이어진다.

세계로 뻗어나간 법의학자 문국진, 그가 진단하는 한국 법의학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앞선 법의학 환경을 직접 보고 싶어 뉴욕 법의관 사무소에 간 문국진 박사.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정식 법의관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된 미국의 법의학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를 몸소 경험했다. 

검시권이 없어 현장 수색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국 법의관과 달리 미국 법의관은 변사체가 발생한 사건의 모든 수사과정을 책임지고 관리한다. 이런 권한은 단순히 제도로만 보장된 것이 아니다. 법의관 통제구역이 되어 길이 막히면 대통령도 그 길을 지나갈 수 없다. 법의관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있는 것이다.

뉴욕 법의관 사무소에 있는 동안 문국진 박사는 커다란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RH식 혈액형을 발견한 위너 박사와 함께 또 다른 혈액형분류법을 발견한 것. 두 사람은 혈액 응집소를 찾아낸 '누리장나무'의 학명을 따서 Cl혈액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혈액형은 침이나 정액으로도 알아낼 수 있어 DNA지문검사가 불가능했던 1970년대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고, 곧 국제학회에서 당당히 인정받을 만큼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세계적인 법의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법의학의 위상을 끌어올린 문국진 박사. 그가 바라보는 우리나라 법의관 제도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법의학계의 큰 스승 문국진은 해방 이후 최초의 법의학 교실을 설립했다.

법의관에 대한 박한 처우와 개선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후배 법의학자들은 계속해서 국과수를 떠났다. 이런 식으론 후진을 양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 문국진 박사는 대학에 법의학교실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접학문인 병리학회의 동의를 받아야했고 수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과목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부탁해야했다. 이런 다양한 노력 끝에 그가 학교로 온 지 6년이 지난 1976년,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문국진 박사는 법의학 교실을 상징하는 심벌을 만들면서 "People are flower…Be genlte(사람은 꽃이다. 부드럽게 대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법의학이 인간의 권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는 뜻이었다.

이런 문국진 박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법의학의 대들보가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경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밝힌 황적준 박사를 비롯한 문국진 박사의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 법의학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후학들을 양성하고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문국진 박사, 현재 법의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문국진 박사에 대한 후학들의 솔직한 고백이 'TV 회고록 울림'에서 공개 된다.

법의학자 문국진의 인생 이모작, 예술과 법의학의 만남 '법의탐적론'은 무엇일까.

문국진 박사는 법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으로 펴낸 법의학 교양서적 '새튼이'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어떤 추리소설보다 흥미롭고 생생한 문국진 박사의 경험담은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책이 인기를 얻을수록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법의학 교양서적이 대중들에게 법의학을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문국진 박사는 이후 '지상아' '배꼽의 미소' 등 다양한 법의학 교양서적을 출판했다.

은퇴 후에도 그의 연구, 집필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우연히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게 된 문국진 박사. 그는 법의학적인 시선에서 문헌, 사진자료 등을 분석해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분석한다. 그는 이렇게 문헌자료와 예술작품을 부검하듯이 파헤쳐 법의학적 사실을 입증해 내는 이 학문을 '법의탐적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젊은 날 법의학을 처음 접하고 심장이 뛰었듯, 새로운 학문과 또 한 번 사랑에 빠진 문국진 박사.

그가 알아낸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화가 모딜리아니가 유독 목을 길게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고야의 '옷 벗은 마하'의 모델은 정말 신분이 높은 귀족의 부인이었을까. 문국진 박사가 법의학적 추리로 밝혀낸 작품 속 진실이 'TV 회고록 울림'을 통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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