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부검'에 관한 국내 학자의 첫 책 출간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1만3천836명이다. 6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하나 여전히 하루에 37.9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 남긴 자료를 분석하고 남겨진 사람과의 면담을 통해 사망자가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내는 책 '심리부검 : 나는 자살한 것을 후회한다'가 2일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심리부검은 아직 우리나라에선 익숙지 않은 용어다. 심리부검은 1950년대 미국 수사기관에서 자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주변인에게 자살 동기를 탐문하는 절차로 시작돼 현재는 자살 예방을 위한 국가적 노력의 첫 단계로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된다.

경찰청 프로파일러 출신으로,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심리부검 전문가 자격을 획득한 저자는 이 책에서 40여개의 실제 사례를 토대로 심리부검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사례 중에는 경찰청에서 근무하면서 직접 접한 사건부터 최진실, 장국영, 정다빈 등 유명인 자살 사건이 포함돼 있다.

책은 사례 분석을 통해 자살의 유형화를 시도한다. 자살사건에 공통적인 패턴을 추출해 유형화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자살 예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1980년대 일어난 허 일병 의문사 사건이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친구 빈센트 포스터 자살 사건을 통해 신뢰성 있는 자살 사건 조사를 위해 제도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짚어본다.

자살사건을 다룰 때 유서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최신 연구 방법을 응용해 한국사람들이 남기는 유서의 독특한 점을 밝힌다.

책은 마치 미국 과학수사 드라마를 보는 듯이 전개된다. 동시에 자살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저자는 그러나 심리부검이 단순히 자살 과정 추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6년 동안 현장에서 수많은 자살사건을 접하면서 '죽겠다는 의지를 찾느라 애쓰다 보면 그 죽겠다는 의지가 사실은 살고 싶다는 의지, 살려달라는 내면의 호소였음을 알게된다'고 밝혔다.

서종환 지음. 학고재. 320페이지. 1만5천원. 


lucid@yna.co.kr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2009년 11월 제주 화순 해수욕장 해변에서 한 여인이 자동차안에서 숨져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에서 남편과 10대 자식을 둔 가정주부 이 모씨가 수면유도제를 탄 소주를 마신 뒤, 차 안에서 번개불을 피우고 목숨을 끊은 것. ‘그를 처벌해주세요’라는 유언장에는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20대의 시동생이 그녀를 강간한 사건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가슴에 묻어둔 채 10여년을 살아오다 남편과 시부모에게 털어놓았지만 오히려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고 애원해 간신히 풀려나온 그녀가 선택한 건 자살이었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첫 심리부검이 이뤄진 사건이다.


심리부검/서종한 지음/학고재
죽음으로 이끈 흔적을 신체에서 찾는 사체부검과 달리 사망자가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을 주변인의 조사와 면담을 통해 찾는게 심리부검이다. 심리부검은 1950년대 미국 수사기관에서 시작돼 현재 자살방지와 유족의 심리 치유 등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 모씨 사례의 심리부검을 맡았던 경찰청 프로파일러 출신의 국내 최초 심리부검 전문가 서종한씨가 쓴 ‘심리부검’(학고재)은 국내외 심리부검 40사례를 통해 심리부검이 왜 필요하고 어떤 효력을 갖는지, 자살의 한국적 유형 등을 사건중심으로 펼쳐나간다. 

우리는 흔히 ‘자살은 한순간’이라는 말로 쉽게 설명하지만 저자가 현장에서 목격한 자살은 고통 그 자체로 표현된다. 살고자 하는 본능을 거슬러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때 몸은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흔들을 남기게 된다.

저자는 자살 사망자는 분명하게 자살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가 실시한 심리 부검에서 자살자 200명 중 89%는 정신질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병원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남은 이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가족 구성원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자살은 사망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가족들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책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한 ‘가짜 유서’ 사례도 실려있다. 당시 고인의 진짜 유서 앞에 덧붙여져 인터넷에 유포된 가짜 유서 사건이다. 이 경우 문체나 분위기가 진짜와 차이가 나 구별이 가능했지만 만일 가짜 유서만 유포된 상황이었다면 그 진위 판정은 매우 복잡했을 것이란 얘기다.

에드윈 슈나이드먼 UCLA교수의 가짜 유서 구별법에 따르면, 진짜 유서는 구체적인 사물, 사람, 장소를 더 많이 언급하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사고과정 혹은 결정과 관련된 단어들의 빈도가 높다. 

책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자살의 한국적 유형화 시도다. 저자는 2009년부터 실시한 심리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자살의 12가지 원인을 찾아내 네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즉 급성스트레스 유형과 만성스트레스 유형, 적극적 자해 자살 시도 유형, 정신과적 문제 유형 등이다.

급성스트레스 유형으로 꼽은 사례는 지난해 발생한 아파트 경비원 분신자살 사건. 평소 활달하고 가족과 주변인과 원만하게 지내왔지만 사건 발생 직전 근무지 이동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무력감, 정서적 불안에 입주민으로부터 인격 모욕을 받은게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다.

만성스트레스 유형은 송파구 세모녀 자살사건이 해당된다. 만성적인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들의 절망적 상황, 도움을 줄 가족이나 친구의 부재로 벗어날 탈출구를 찾지 못한 경우다.

저자는 이를 토대로 ‘고위험군 분류 프레임워크’를 만들어냈다. 자살과 관련된 직접적 요인과 추가적 위험요인에 따라 위험도를 분류한 것. 가령 최진실 사례의 경우, 필수위험요인1(‘죽고싶다’‘아이들을 부탁한다’)+추가적 위험요인 4개이상(악성 댓글, 불면증, 이혼, 부부폭력, 우울증. 자살자 경험 등)에 따라 고위험군에 속한다.

책에는 지난 수년간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자살사례가 망라돼 사회 심리 안전망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심리부검이 남겨진 이들에게 기억과 후회, 애도할 시간을 줌으로써 상처 치유의 역할을 한다든지, 심리부검이 법적 증거로 채택되기 위한 표준화 문제 등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meelee@heraldcorp.com








서울 마포대교 전망대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고가 발생해 구조대원들이 남성을 구조하고 있다(영등포소방서 제공)./뉴스1
2017년까지 2년에 걸쳐 관련 데이터베이스 구축·전문요원 양성 
지난 11년째 OECD 자살률 1위 불명예 잡을 정부 차원의 대책


(서울=뉴스1) 음상준 기자 = 보건당국이 심리부검체계를 구축하는 사업에 내년에만 10억원가량을 투입한다. 정부는 이 예산으로 지난 4월 문을 연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운영하는 한편 자살유가족에 대한 사례관리 등을 담당할 전문 수행기관을 모집해 지원하는데 쓰인다.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은 전문성을 갖춘 면담자가 자살 사망자의 유가족을 인터뷰하면서 생전 고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말한다. 고인이 사망하기전 일정기간에 어떤 심리적 행동 양상을 보였는지, 스트레스와 병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자살 원인을 추정한다. 

21일 복지부에 따르면 심리부검체계 구축 사업은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된다. 내년 예산은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운영할 1개 기관을 선정해 9억60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7년 사업은 전년도 사업 실적을 평가해 지속 여부를 결정하고 예산은 정부 사정에 따라 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는 내년 1월 4일까지 심리부검체계 구축에 참여할 기관을 모집할 예정이다. 심리부검을 수행할 전문기관은 정신보건시설이나 학교, 사회복지법인, 전문인력을 갖춘 비영리법인 등이 대상이다. 선정된 기관은 심리부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전문요원을 양성하는 등 한국형 조사체계를 구축하는 업무를 맡는다. 

정부 차원에서 심리부검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지난 2013년 1월부터다. 당시 부산시와 부산경찰청이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전국 최초로 심리부검을 시행했다. 

그 결과 부산시는 정신과 치료경험이 있거나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 40대 무직자 등을 대상으로 예방 교육을 강화하면 자살률을 낮추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자살은 경제·사회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직업 분포도에서는 무직이 전체 절반가량인 48.4%를 차지했다.

정부가 심리부검에 주목하는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1년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개선하려는 고육지책이다. 통계청의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고의적 자해 사망자(자살)는 총 1만3836명으로 전년대비 591명(-4.1%) 감소했다. 하루 37.9명꼴이다. 

또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지난해 27.3명으로 전년 28.5명보다 다소 줄었고, 2008년 26명 이후 6년만에 가장 적었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OECD 평균 12명(2013년 기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복지부는 "심리부검을 통해 발견한 자살유가족에 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자살률 감소를 위한) 지속적인 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신문]

변사사건처리부 한 장에 정리된 노인의 죽음은 냉정하리만큼 간단명료하다. 한 해 노인 3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에서 오늘도 또 다른 노인의 죽음은 늘 하던 방식대로 기록되고 정리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인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이 부끄럽다고 외치지만, 정작 무엇이 노인들을 벼랑 끝에 서게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 해 벼랑 끝에 서게 되는 노인이 3500명이나 되는 현실을 그리고자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은 심리·정신분석 전문가들과 함께 자살자에 대한 ‘심리적 부검’을 시도했다. 심리부검이란 자살자의 유서나 가족·동료와의 면담 자료 등을 수집해 자살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 전까지 노인이 거쳐 온 삶의 궤적을 좇아 ‘마음속 지도’를 그리기 위함이다.



높은 자살률로 고민이 많던 핀란드는 1980년대에 행했던 한 해 동안의 자살자 전원에 대한 심리부검을 통해 10년 새 자살률을 20% 포인트 넘게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걸음마 단계다.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전국 자살자 가족을 상대로 심리부검을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의 실적은 121건으로 많지 않다. 여기에는 죽음 앞에 침묵하는 문화 탓이 크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은 100여명의 노인 자살자 유가족 등을 만났지만 실제 심리부검을 허락한 것은 7가족뿐이었다.

이번 심리부검은 서울신문이 중앙심리부검센터에 의뢰해 한국형 심리부검 체크리스트인 ‘K-PAC 2.0’으로 진행됐으며, 유가족 면접은 임상심리 전문가가 진행하되 서울신문 취재진이 사례를 발굴하고 면접 과정에 모두 참관했다. 국내 언론이 다수의 노인 자살자를 대상으로 전문가 집단과 함께 심리부검을 진행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조사 결과는 복지부가 구축하고 있는 국가 심리부검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858~1917)

사연 없는 주검이 있을까.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례는 노인을 자살로 이끄는 공통된 키워드를 찾기 위해 중앙심리부검센터와 진행한 총 7건의 심리부검 중 대표적 사례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름이나 주소지 등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두 노인을 자살로 내몬 상황과 심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키워드별로 부산, 충남 등에서 진행한 노인 심리부검 98건에 대한 통계(숫자 표시)와 전문가의 해석(알파벳 표시)을 덧붙였다.



■스스로 세상 버린 두 노인… 그들의 심리를 읽다 

[주검1]

“안방에서 죽었어. 그라목손(ⓐ) 먹고. 여서 꼬꾸라졌는디…거긴 보기도 싫여.”

2개뿐인 앞니에 박유순(69·가명) 할머니의 발음은 샜지만 악몽 같았던 그날 하루의 기억은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다. 시부모 봉양으로 시작해 남편과 50년 이상을 함께한 흙담집(①)에서 남편 김희준(81·가명)씨는 지난 4월 중순 제초제(②)를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달이 난 건 7개월 전이다.



그날 아침 달라진 남편의 행동은 할머니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남의 농사일을 돕다 갈비뼈 골절(③)로 한 달여간 누워만 있던 할아버지(④)는 작심한 듯 성질을 부렸다. 밑도 끝도 없었다. 머리맡에 놓인 과도를 들고는 “문 닫고 나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 아저씨는 원래 나한테 군소리 안 하고 다정한디 그날은 이상혔어. 과일 깎아 먹으려고 놔둔 과도를 들고 눈에 불을 싸지르면서 갑자기 나한테 문 닫고 나가라고 하는 거여. 겁이 나 문 닫고 나와 마당서 나물 두 바가지를 씻고 문 열어 보니 제초제를 마시고 쓰러져 있더라구.”

빗속을 뚫고 시속 100㎞ 이상을 달리는 구급차가 마치 경운기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청주 병원을 거쳐 다시 천안의 대학병원으로 갔지만, 할아버지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불행이 다가온 건 지난 4월이다. 할아버지가 집 뒤 대나무 밭에 갔다 넘어져 갈비뼈 2대가 나갔다. 병원에 갔지만 계속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퇴원하고 며칠 후에 남의 삼밭 일을 도와준다며 경운기를 몰고 언덕배기를 오르는데 경운기가 넘어졌다. 다시 갈비뼈 3대가 나갔다. 의사는 “뼈가 다 붙은 뒤 퇴원하라”고 권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보름치 입원비로 내야 하는 90만원도 이미 노부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돈이었기 때문이다.

퇴원 후 할아버지는 끼니는 물론 화장실 가는 일조차 혼자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늘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할머니는 가끔 나오는 남의 밭일이나 공공근로를 하러갈 수밖에 없었다. 돈이 원수였다. 주변에서는 병간호하는 사람을 붙이든 당분간 요양원에 보내든 하라고 권했지만, 매달 40만원이 드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일을 나갔다.



“먹고살려면 계속 일을 나가야 하니까. 찌개 끓여놓고 조기새끼 가시 다 발라놓고 남의 밭에 쑥 뜯으러 갔어. 그러고는 일 다하고 집에 갔더니 온종일 우리 아저씨가 밥(ⓑ)도 못 먹고 누워 있는 거여. 지 혼자 일어나지를 못하니까 밥도 못 먹고 있더라구. 그렇게 밥 좋아하는 양반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할아버지 밥 떠먹여 주면서 그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그리고 하루 있다가 그렇게 됐어.”

지긋지긋한 가난은 대물림을 받았다. 그나마 젊을 때는 몸뚱이가 재산이었다. 머슴 일부터 남의 농사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다들 가난한 때라는 위안을 하며 평생 농사일을 했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희망도 있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쌀 7가마니 정도가 나오는 작은 땅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꿈도 잠시. 몇 년 전 아들의 빚을 갚느라 전답을 모두 날렸다. 할아버지는 몇 년간 ‘그 땅은 쳐다보기도 싫다’며 애먼 산을 돌아 빙 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 고단한 삶 속에서 3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것만도 대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년의 삶은 더 곤궁했다. 몇십만원이 전부인 통장 잔고는 늘 한 달을 못 버텼다. 할아버지가 팔순이 넘으면서 바깥 일은 거의 할머니의 몫이었다. 남의 밭에 일을 나가거나 공공근로를 해서 버는 돈은 20만~30만원 정도, 노령연금 등을 합쳐도 손에 쥐는 돈은 늘 50만~60만원(⑤)을 넘지 않았다. 땅 빌리는 데 드는 돈에 전기요금, 난방비, 약값, 식비, 부조금 등을 내면 남는 돈이라곤 몇만원 정도였다.



“한 2년 전에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아파서 드러누우면 스스로 죽어야지, 남한테 피해가 가기 전에… 치료비(⑥) 때문에 산 사람도 못 살게 할 순 없잖아’라고…. 그때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타박했는데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좀 했었나 봐.”

어려서부터 가난한 삶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점잖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시골 투전판에 낀다든지 바람을 피우는 일도, 그 흔한 주사 한번 부리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살아생전 집안에서는 큰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유품을 확인하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십년을 써 다 낡고 눅눅해진 남편의 지갑 속에 3만원이 찰싹 들러붙어 좀체 나올 줄을 몰랐다. 시어머니가 읽었던 성경책 등에선 몇 년을 모았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꼬깃꼬깃한 지폐 109만원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뒤늦게 발견한 할아버지의 쌈짓돈은 농협에 빌린 200만원을 스스로 갚아 보려는 마음인 듯했다.

가난한 부모는 3남매(ⓒ) 중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 배우고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 남들처럼 좋은 것 못 먹이고 부족하게 가르친 것이 항상 미안했다. “생활비 대주는 애들은 없지만, 명절 때는 와요. 자기들 애들 키우고 밥 먹고 살려면 부모까지 챙길 여유가 있나. 자기 쓸 돈도 없을 거야.”



할머니는 못내 후회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죽으려고 했나. 하도 이불을 걷어차서 3~4개월 전부터 이불을 따로따로 덮었거든. 근데 언젠가 ‘임자, 내 곁에 와서 자’(ⓓ) 이러는 거야. 그래서 ‘더운데 뭘 같이 자’라며 홱 돌아서서 잤지. 그리고는 사흘 뒤에 그렇게 됐어. 그런데 우리 아저씨 돌아가시고 3일장도 못 치렀어. 며칠 지나지도 않아 공공근로 시작했지. 눈물도 안 말랐지만 목구녕이 포도청이니 그래도 나가야지. 일 안 하면 돈 못 받잖우.”

[주검2]

“아버지는 평생 가난했어요. 그렇지만 한번도 열심히 일하시지 않은 적은 없었죠.”

이명자(44·여·가명)씨는 아버지 이영재(가명)씨의 정확한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매번 외워 보려 하지만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부친의 죽음은 그만큼 잊고 싶은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일흔일곱 되던 2011년 3월(⑦) 고향인 전남 XX군 시골집에서 숨졌다. 사인은 병사(病死). 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사망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자살이라고 여긴다. 마흔살 때 한번 자살하려고 했던 전력이 있었고 사촌형(ⓔ)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가족사에 아픔도 겪었던 아버지였다. 딸 이씨는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렇게 돌아가시면 남은 자식들이 평생 손가락질 당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병사로 위장하려고 굶는 방법을 택하신 것 같다”고 했다.



이씨가 남긴 전 재산은 현금 200만원. 갚지 못한 농협 대출금 수백만원을 생각하면 실제 유산은 빚밖에 없다. 가난은 촌로의 게으름 탓이었을까. 하지만 딸 이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부지런한 소작농(⑧)’이었다. 거둬들인 농작물의 절반은 땅주인에게 주고 남은 것의 절반은 자녀 5명에게 골고루 나눠 줬다. 그리고 남은 곡식을 팔아 푼돈을 벌었고 알뜰히 모았다. 선천성 난치병을 앓던 막내아들(ⓕ)이 있었기에 ‘아이가 먹고살 돈은 남기고 가야 한다’는 부채 의식에 더 악착같이 일했고, 또 모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전 재산 1800만원을 친척에게 사기당해 모두 잃고 막내는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면서 허사가 됐다.

아버지 이씨의 황혼녘에 남은 것이라고는 ‘자식을 앞세웠다’는 허망함, 그리고 가난뿐이었다. 노인성 우울증(⑨)이 찾아왔고 76세 되던 해에는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늙은 부정(父情)은 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아비마저 기대기에는 딸들의 삶이 이미 퍽퍽했다. 빈곤의 대물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사는 고향집에서 외롭게 앓았다. 뒤늦게 아버지의 투병 사실을 알아챈 딸은 지역 대학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지만 의사는 “어차피 돌아가실 분(ⓗ)인데 뭐하러 데려왔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음식과 물을 전혀 먹지 않았다. 어머니의 애타는 부탁과 만류에도 곡기를 끊었고 굶은 지 15일 만에 숨을 거뒀다.

빈곤한 노년은 늘 벼랑 끝에 서 있지만 내색할 수 없다. 가족들은 늙은 부모의 자살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이며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인은 오히려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드물며, 모든 연령대 중 자살을 가장 치밀하게 준비하는 세대”라고 말한다. 심리부검에 응했던 딸 이씨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먹먹하게 말했다. “유품 중 아버지 수첩이 있었는데 가족 생일과 제사만 적혀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을걷이(ⓘ)를 해 보내주실 만큼 가족만 위하다가 즐기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도대체 왜….”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유영규 팀장 whoami@seoul.co.kr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서울신문]

가난한 노인에게 한국은 버티기 힘든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이를 방증한다. 심리적 부검을 통해 사후(死後)에 취재원이 돼 준 노인들은 그들이 자살에 이르게 된 경로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빈곤+α’.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이 지난 10월 1일부터 11월 31일까지 보건복지부의 중앙심리부검센터와 직접 진행한 총 7건의 노인 자살자 심리부검 결과와 부산시·충청남도 등으로부터 받은 자살 유가족 심리면담 자료 98건 등을 분석해 얻은 노인 자살의 공식이다. 다수의 노인이 빈곤의 늪에 빠진 현실에서 불행히도 ‘α’는 다양하다. 지병 또는 갑작스러운 질병, 심리적 고립감, 가족과의 불화, 폭력과 학대 등이 이미 벼랑에 선 노인들의 등을 떠민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년층도 경쟁에서 이길 힘을 잃으면 떠나줘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각자도생’의 냉엄한 사회에서 끝내 버티지 못한 한국 노인들은 2시간 30분마다 1명씩(2014년 기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난에 허덕이다 끝내 잘못된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노인들의 사연을 통계와 사례로 살펴봤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을 자살로 내모는 주범은 ‘빈곤’이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노인(65세 이상)의 10.9%가 60세 이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된 이유로는 경제적 어려움(40.4%)을 가장 많이 꼽았고 ▲건강 24.4% ▲외로움 13.3% ▲부부·자녀·친구와의 갈등 및 단절 11.5% ▲배우자·친구 등의 사망 5.4% 순이었다. 특히 잘사는 노인보다 못사는 노인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다. 소득 하위 20%(연 소득 754만원 이하) 가구의 노인 중 자살을 생각해 본 비율이 16.5%인 데 반해 소득 상위 20%(연 소득 3426만원 초과) 가구의 노인은 절반인 8.3%에 그쳤다.




현대사에서 경기침체가 자살률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를 봐도 노인 자살과 빈곤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박지영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인 자살률이 크게 늘었다”며 “자살은 경제적 어려움 등 원인 상황이 불거지고 2~5년 뒤 급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인구 10만명당 노인 자살률은 1997년 30.3명이었지만 외환위기(1997~98년)로 경제 성장률이 곤두박질치고 나서 3년 뒤인 2001년 42.0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카드대란(2003년)의 여파 등이 겹치며 노인 자살률은 급증세를 보였고 2005년에는 80.3명에 달했다. 노인 자살률은 이후 잠시 감소세를 보였지만 미국발 금융위기(2008년)의 여파로 2010년에는 역대 최악인 81.9명까지 치솟았다.

자살 문제 전문가들은 “빈곤만으로는 노인 자살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빈곤에 추가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더해질 때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노인 자살을 부추기는 첫 번째 공범은 ‘병환’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수사한 60세 이상 자살자 4141명 중 육체적 질병 탓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난 건이 1824명(44.0%)으로 가장 많았다. ‘건강=돈’인 우리 사회에서 노환이 찾아오면 경제적 어려움은 증폭된다. 박 교수는 “노인들은 질병 탓에 겪는 통증보다 경제적 부담과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존재의 고민을 한층 심각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특히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가장’으로서 더욱 큰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남성 노인들은 건강 악화로 돈을 벌 수 없게 되면 자살하는 사례가 여성보다 더 많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은 심리적 어려움 등을 겉으로 드러내 해소하기 어렵고 자살 방법도 훨씬 과격해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다”고 말했다.

외로움과 심리적 고립감은 노인을 절벽 아래로 미는 두 번째 공범이다. 가족의 해체가 노인을 가난하게 또 외롭게 만든다. 국내 노인 인구 중 혼자 사는 비율은 2000년 16.0%였으나 이후 증가해 2010년 19.4%, 2015년 20.8%로 치솟았다.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독거노인 비율은 계속 늘어 2020년이면 21.6%에 이른다. 젊었을 때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대신 늙어서는 자녀에 의지해 살던 전통적 가족 복지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최 교수는 “지금 노인 세대는 늙은 부모를 봉양한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로부터 부양받지 못한 첫 번째 세대”라면서 “가족 부양 체계가 이 정도로 해체될 것으로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 심리적으로 대비 없이 노년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특히 고향을 홀로 지키며 사는 농촌 노인은 심리적 어려움에 취약하다. 김도윤 충남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 부센터장은 “충남의 농촌 지역에서 노인 자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경제적 어려움, 질병 문제에 관계 단절로 인한 고독감이 겹치면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전했다.

충남의 한 농촌 마을에서 3년 전 음독자살한 김신옥(82·여·가명)씨는 ‘가난’과 ‘관계 단절’의 이중고 속에 죽음에 내몰린 사례다. 아들 둘, 딸 둘을 뒀던 김씨는 재산의 대부분을 큰아들에게 증여한 뒤 다른 자녀들과 불화가 생겨 관계가 멀어졌다. 그나마 같은 지역에 살며 의지했던 큰딸마저 병으로 사망했고 이후 둘째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아들이 집을 담보로 빚을 지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다. 이웃과 왕래조차 없었던 그는 지역 보건소장에게 “죽고 싶다”고 자주 털어놨지만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자 결국에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이렇듯 노인에게 자녀는 ‘힘들어도 버티게 하는 존재’여야 하지만 때로는 자살 생각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노인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경제력을 잃으면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힘든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하는 일이 많다. 고선규 중앙심리부검센터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의 노인 중에는 짐이 된다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자식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살하는 일이 다른 나라보다 많다”고 말했다.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유영규 팀장 whoami@seoul.co.kr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그래픽 김예원 기자 yean811@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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