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 없도록 법·제도 뒷받침 해야"...법의학과 의료윤리 조명
새 대한법의학회장 최영식 NFS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 선출...내년부터 임기



▲ 대한법의학회 차기회장에 선출된 최영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NFS)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왼쪽)과 박종태 대한법의학회장(전남의대 교수). 최영식 차기회장은 내년 1월부터 2년 임기를 시작한다.ⓒ의협신문 송성철


"한국 법의학의 수준은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법률적 제도적 지원은 아직 부족합니다."


박종태 대한법의학회장은 20일 고려의대 유광사홀에서 열린 제39차 추계학술대회에서 "대량재해 발생 시 개인식별·법의혈청학·법치의학·법의곤충학·법의영상학 등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며 "서래마을 영아유기사건·서남아시아 지진해일 참사 희생자의 개인식별 등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수준으로 향상했다"고 밝혔다.


2006년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을 단시일에 해결하면서 한국의 법의학 수준이 세계적으로 입소문이 났다.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세월호 참사(2014년) 등 대량참사가 발생했을 때 외국 법의학 전문가의 손을 빌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2014년 10월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FF) 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국내 기술로 개발한 '대량재해 희생자 신원확인 시스템(MIM)'을 외국에 전수할 정도로 법의학 기술이 발전 가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법의학 발전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는 아직 미진한 실정이다.


장정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NFS)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법의조사과 의무사무관(법의관)이 이날 발표한 '2014년 부검률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총 사망자 26만 7672명 가운데 13.3%(3만 5478명)가 변사자로 집계됐다. 이들 변사자 가운데 NFS나 관학협력의대에서 부검이 실시된 것은 15%(5324건) 가량. 전체 사망자 대비로는 2.0%에 불과하다.


박 회장은 "선진국에서는 사망자에게 조금의 의심만 있어도 변사자로 취급하고, 이 중 15∼30%를 부검한다"며 "단 한 명이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법의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의학에 대한 인식이 낮다보니 제도적인 뒷받침도 허술한 실정이다.


엄창섭 고려의대 교수(해부학교실)는 '법의학과 의사윤리' 주제발표를 통해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개인 식별이 안된 상태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체 조직의 경우 처리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어 마냥 보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며 "법률을 개정해야 하지만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표도 없으니 법률 개정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시신에 대한 부검윤리도 의료윤리와 마찬가지로 엄숙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엄 교수의 주장.


엄 교수는 특히 "시신에서 얻은 사체의 일부를 전시까지 하며 상업화 하는 경향이 있다. 사자의 동의는 물론 기증에 대한 한계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며 "최근 들어 시신을 활용한 교육·연구·산업 등에서 활용이 증가하면서 해부학자·병리학자·법의학자 외에 해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넓히는 데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 정기총회에서는 최영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이 내년 1월부터 2년 동안 학회를 이끌어 갈 새회장에 선출됐다.


최 차기회장은 1983년 한양의대를 졸업하고, 한양대부속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전공의과정을 거쳐 1987년 전문의자격을 취득했다. 1991년 법의관으로 NSF에 발을 들였다. 법의학부장을 거쳐 2013년 12월 초대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에 임명됐다. 학회에서 국제교류협력위원장을 맡아 2014년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기여했다.


최 차기회장은 "검시 집행 책임은 검사가, 집행은 경찰관이, 검안서 작성은 의사가 하고 있고, 변사자 부검은 반드시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다"며 "최근 들어 형사사건뿐만 아니라 민사 사건에서도 보험 수급 문제를 놓고 현장 검시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는만큼 여러 부처와 관계자의 의견을 모아 검시제도를 선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박종태 대한법의학회장과 한국 법의학의 개척자인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오른쪽)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의협신문 송성철


법의학회 학술상은 지난해 학회 학술지에 총 5편의 논문을 발표한 나주영 NSF 광주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연구원이 2년 연속 수상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제3회 '도상 법의문화상'은 월간 조선 오동룡 차장이 받았다. '도상 법의문화상'은 법의학 발전에 공헌한 언론 및 문화계 인사를 선정, 학술대회 때 시상하고 있다. 도상(度想)은 법의학 선구자인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의 호.


오 차장은 30년 논란 끝에 자살로 결론 난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10여년 간 취재하고, 기획기사 '유병언 변사 1년여, 한국의 검시제도 개선되나'를 통애 법의학의 인식과 제도 개선에 기여한 점을 평가 받았다. 


1회 수상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2회는 드라마 '싸인'에서 법의관 역할을 맡은 배우 박신양 씨가 받았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이윤성 대한의학회장과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을 비롯해 전국 법의학교실과 과학수사 연구분야에 몸담고 있는 전문가들이 참석, 법의학 한 해 연구 성과를 결산했다. 



의협신문 송성철 기자 | good@doctorsnews.co.kr








[이색 직업인] 법의학 전문가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법의관의 삶에 대해 듣기 위해 만난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의 얼굴에선 법의관다운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사건 현장의 증거들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빛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 원장은 1991년 법의관에 임명된 이래 25년째 외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기자는 인터뷰에 앞서 “예전에는 조금 생소했던 ‘법의관’이라는 직업이 최근엔 미국·한국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많이 친근해졌다”고 운을 뗐다. 서 원장이 최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인에 대한 감정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의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역할이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법의관은 범죄나 사고에 관련된 죽음을 조사하는 직업입니다. 사인(死因)과 사망 경위를 의학적·과학적으로 분석하죠. 법의관은 명칭만 달라졌을 뿐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검시(檢屍)제도와 같은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직업 중에 하난데,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물질만능주의에 빠지면서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이 기피하는 길 중 하나가 됐죠.”

서 원장 역시 처음부터 법의관이 될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당시에는 병리학에 종양학, 면역병리학, 법의학 등 세부전공이 있었다”며 “사람들이 법의학은 전공을 잘 안 하니까 법의학을 공부하면 좀 더 훌륭한 병리학 교수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국과수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조금 불순한(?) 의도를 갖고 법의관이 됐지만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사건을 맡기 때문에 같은 법의관이라도 전혀 다른 사건을 맡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순번일 때 큰 사건을 많이 맡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게 됐고, 사인이나 사망 경위를 밝혀내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는 연세대생 노수석군 사망사건, 최덕근 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 피살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살인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사건들을 도맡아 왔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등 대규모 사건의 부검, 검안에도 관여했다.

수천건의 부검을 해오는 동안 법의관으로서 힘든 점은 없었을까.

“법의관은 한 사건을 맡으면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굉장히 복잡한 데이터까지 분석한 후, 자신이 갖고 있는 법의학에 대한 신념에 입각해 법정에서 감정 결과를 발표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기면(그러면) 기고(그렇고) 아니면 말고’ 식의 추측이 아니라는 거죠. 이번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례처럼 과학적인 수사 결과를 국민들이 믿지 못할 때 힘이 듭니다.”


- 서 원장은 201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한 후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왔다. 2주 만에 8만명의 감정 지연(遲延) 건을 처리하고, 감정 기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범죄 현장에 답이 있다
서 원장은 미국의 ‘과학수사대(CSI)’와 우리나라의 법의관이 다른 점은 ‘수사권’의 유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변사체가 발견되면 법의관(ME·Medical Examiner)이 중심이 된 CSI가 출동해 현장 감식과 부검, 수사까지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 ‘전담 검시제’를 채택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경찰 등 수사당국이 검시 업무를 겸하는 ‘겸임 검시제’로 운영된다. 변사체가 발견되면 경찰의 초동수사반이 기초적인 검시를 진행한다.

그는 “국과수는 수사기관의 협조를 얻어야만 수사가 가능하다”며 “점차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기본적으로 수사기관과 국과수가 서로 믿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법의관은 수사 초기 단계에 현장에 가지 않고 사건 기록과 현장 사진을 보고 사건을 접하는데 사건 개요가 잘못 작성돼 있어 오판을 한 적도 있다”며 “법의관이 현장에 꼭 가야 하는 이유는 현장에 답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어진 자료 외에 새로운 증거가 많이 나타나면 재(再)감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인데요. 재감정을 통해 23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을 때, 이에 항의해 분신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총무부장이던 강기훈 씨가 대신 써줬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돼 복역했던 사건이다.


법의학은 인간의 최종 운명을 가름하는 학문
서 원장은 2006년부터 법의관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고 법의학의 장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양각층의 사람들에게 강의를 해왔다. 서 원장은 “부검실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물이 역류해서 바닥에 질퍽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며 “꾸준한 강의를 통해 이 같은 현실을 알렸고, 그 덕분에 환경을 개선하고 봉급도 올리고 사회적 이미지를 높였다”고 말했다.

지난 201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려낸 SBS 드라마 〈싸인〉은 서 원장의 강의 내용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싸인〉은 한국판 ‘CSI : 과학수사대’로서 법의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 원장은 “실제로 드라마 방영 이후 법의관이 되려는 의대생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며 “국과수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해주고 주인공역을 맡은 박신양 씨가 교육을 받고 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25년간 수많은 범죄현장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살려낸 그에게 법의학이란 무엇일까.

“저는 법의학이 인간의 최종 운명을 가름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죽음도 삶의 연장입니다. 사람은 죽어도 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있잖아요. 어떤 분이 명예롭게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 명예를 지켜드리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검을 통해 억울함을 풀어드리는 거죠. 그렇게 가족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하는 겁니다. 죽음은 그 삶의 종점을 찍는 것이지만,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가기도 하는 거죠.”  

 

▒ 서중석 원장은…
1957년생, 83년 중앙대 의학과 졸, 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 94년 중앙대 대학원 의학 박사, 201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 부장,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대한법의학회 감사, 아시아법과학회 회장.


글:
 백예리 기자 (byr@chosun.com)
사진: 이신영







부검 대상 명문화·검시는 법의관이… “죽음의 사각지대 해소”
우리나라 검시제도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수십년 동안 곪아 온 제도를 바로잡으려면 간단한 처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가장 이상적인 대수술은 법의관 제도를 만들어 현재 검사에게 있는 검시권을 법의학자에게 주는 것이다. 수사는 수사기관이 맡고 시체는 법의관이 맡아 각자 전문성 있는 일만 하자는 얘기다.



응급처치도 시급한 현실이다. 검시 대상 죽음을 법에 명시하고, 검안을 할 수 있는 의사의 조건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러한 장·단기 대책을 함께 추진해야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산 자의 의무’를 다해 ‘죽은 자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다.

◆검시권은 법의관에게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검시권을 의학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망 원인을 밝히는 일 자체는 환자를 진단하는 것이니 당연히 의사 몫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의사 역할은 현재 경찰 요청에 응하는 참고인 또는 감정인 수준이다. 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조차 마찬가지다. 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의 몫이듯 검시는 의사가 하고 그 결과에 대한 법적 판단은 사법부가 할 일이라는 것이 법의학계 주장이다.

하지만 “검시는 사망의 원인이 범죄인지 밝히기 위한 절차로서 ‘내사’에 해당하는 사법행위”라는 것이 법조계의 입장이다. 의학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의사를 검시체계에 넣을 수 없으며 검시권을 의사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영미법 체계 국가처럼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 또 다른 수사기관으로서 법의관 또는 검시관을 법령에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형법체계 전반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수사당국은 이보다는 검시 전문인력, 즉 법의학자의 부족을 현행 검시체계의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지금도 초동수사 단계에서 의사들의 참여는 가능하지만, 법의학 지식을 갖춘 의사가 부족해 부검 단계에서야 법의학자가 개입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의학계는 설령 법의학자가 대거 쏟아져 나온다 해도 그들을 받아줄 현장이나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황인 만큼 제도 정비가 선행해야 인력 양성이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또 수사기관 개입은 법의학자가 시체를 살펴 타살이 의심된다고 판단한 후에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김장한 서울아산병

원 교수는 “시체를 살피는 것은 수사와 아무런 관계 없는 수사 전 단계”라며 “법의관이 검시권을 가질 경우 부검을 위해 시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는 것을 가지고 수사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상황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검 권한을 가진 법의관 제도를 만들게 되면 법의관은 병원 밖에서 사망해 검안해야 하는 모든 죽음을 총괄하게 된다. 범죄 연관성에만 초점을 맞춘 검시로 등한시됐던 행정검시도 가능해진다. 

법의관 제도가 장기적으로 마련된다면 법의학자 숫자도 늘게 된다. 법의학 전문의 과정을 신설하고, 의과대학에 법의학교실 설치를 의무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국 의대에 법의학교실이 생기면 전국을 담당할 수 있는 법의관 200명 양성도 4∼5년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윤성 서울대 교수(법의학교실)는 “10년, 20년 뒤에 검시 전문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따져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회의 권고안이 주는 메시지 주목

검시체계의 모범답안을 작성하기 위해선 유럽회의(유럽 42개국 가입·유럽연합과는 다른 조직)에서 1999년 내놓은 ‘회원국의 법의검시규정 일치에 관한 각료위원회의 권고안’을 주목할 만하다. 권고안이 나온 지 15년이나 됐지만 후진적인 한국의 검시제도에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고안에서는 법의전문가나 법의학적 검사에 익숙한 의사가 검시를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다만 타살과 타살이 의심스러운 죽음은 반드시 법의전문가가 검시하도록 돼 있다. 또 ‘법의전문가는 어떠한 형태의 압력에도 굴복해서는 안 되고 직무를 수행하는 데 객관적이어야 하며, 특히 결과와 결론을 표현하는 데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법의학자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부검을 해야 하는 죽음은 10가지로 정해놨다. 타살과 타살이 의심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고문 또는 어떠한 형태의 학대를 의심할 수 있는 인권 침해, 직업병과 직장의 위해, 기술적 재해 또는 환경적 재해 등이 대상이다. 범죄로 인한 억울한 죽음뿐 아니라 재해로 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유럽회의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권고안은 부검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도 해놓았다. ‘부검은 가능한 한 한두 명의 의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며, 그중 최소 한 사람은 검시의학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보험분쟁·의료사고 느는데…검시의 또 다른 적폐들

김모(47)씨는 2012년 1월28일 직장 동료와 경기 양평 용문산을 등산했다. 1시간30분가량 산행 끝에 정상을 눈앞에 둔 김씨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다시 1시간30분 만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숨을 거뒀다. 응급실 담당 의사는 심근경색이 의심되는 김씨 사인을 그냥 ‘미상’으로 적어 시체검안서를 발급했다. 경찰은 ①사망 당시 목격자가 있었고, ②타살 혐의점이 없으며, ③유족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검하지 않고 사인미상인 상태로 사건을 종결했다.



사인불명의 김씨 죽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됐다. 김씨는 심근경색 진단 시 20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보험에 특약가입한 상태였다. 보험사는 사인미상이라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시체검안서상 사인이 미상이고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흉통을 호소하고 쓰러진 사실만으로 급성심근경색증 때문에 죽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족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금전적 손해까지 입게 됐다.

국내 검시제도하에선 이런 억울한 사례가 흔하다. 검시가 오로지 범죄 연관성만 따지는 ‘사법검시’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보험분쟁, 전염병 예방, 의료사고 조사 등에서도 검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범죄와 무관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 ‘행정검시’는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도는 갖춰져 있지만 사실상 전무

법에서는 행정검시를 할 수 있는 경우를 3가지로 정하고 있다.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 제6조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 국방부 장관 또는 광역·기초자치단체장이 시체를 해부하지 않고는 사인을 알 수 없거나 이로 인해 국민 보건에 중대한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시체의 해부를 명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0조에서는 질병관리본부장에게 국민 건강에 중대한 위협을 미칠 우려가 있는 감염병으로 사망한 것이 의심되는 때 시체 해부를 명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경찰청의 행정검시규칙에서는 범죄 연관성이 없더라도 수재, 낙뢰, 파선 등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 또는 행려 병사자를 검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이뤄진 행정검시는 없다. 국내 부검 대부분을 맡고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2012년 실시한 5159건의 부검 중 경찰에서 의뢰한 것이 4907건, 해양경찰 211건, 군 17건, 기타(교도소 등) 24건이었다. 경찰이 하는 검시가 사법검시 위주인 것을 생각하면 행정검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윤성 서울대 교수(법의학 교실)는 “교통사고가 나서 타고 있던 사람이 다 죽었을 경우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해도 탑승자가 다 죽었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는 더는 수사하지 않는다”며 “누가 운전했느냐에 따라 보험금 지급이 달라지는데 우리나라 검시제도는 검사가 지휘권을 가진 범죄수사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제도·인식 부족이 원인

행정검시가 등한시되는 것은 검시를 총괄하는 기구가 없는 등 검시제도가 체계적이지 않은 영향이 크다. 

검시 관련 규정은 형사소송법, 의료법,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행정검시규칙 등 최소 6가지 이상이다. 규정이 여러 개라는 것은 권한이 분산돼 있어 체계가 없다는 뜻이다. 

검시를 총괄하는 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변사체는 그나마 검시체계가 갖춰진 수사기관 소관이 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행정검시는 이뤄지지 않고 사법검시 위주로 흘러간다. 사인이 명확하지 않아 받지 못하는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지, 의료사고나 산업재해와 관련 있지만 그냥 처리되는 죽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검시를 꺼리는 사회적 인식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장례 절차를 중시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이는 범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 상황에서는 부검을 꺼리는 현실로 이어진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2년 전국(제주 제외) 성인남녀 1000명에게 물어봤더니 검시를 꺼리는 이유 중 ‘검시가 신속하게 처리되지 못해 장례일정과 절차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된다’는 것에 대해 45.5%가 조금 그렇다, 14.8%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몸이 잘린다는 것이 두벌죽음이라 여겨 비인간적이다’라는 것에는 조금 그렇다 27.8%, 매우 그렇다 11.7%로 나타났다. 행정검시 관련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에스제이 손해사정의 최순진 대표는 “유족에게 부검을 왜 안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다 똑같다”며 “‘(사망 당시에는) 경황도 없고 어느 누가 부검을 원하겠느냐’고 말한다”고 전했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軍, 부검 않고 “질식사” 발표 후 정정…‘현장 보존’ 기본 원칙마저도 안 지켜



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은 군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군, 부검하기 전 사인 발표


지난 4월6일 부대 내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한 윤 일병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가해자들은 응급조치를 취한 후 병원으로 이송했다. ‘현장 보존’이라는 검시의 기본원칙부터 무너졌다. 

다음날인 7일 육군은 부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윤 일병 사인을 ‘기도폐쇄에 의한 질식사’로 발표했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질식하는 바람에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후 국방부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실시한 부검 감정서에 따르면 윤 일병은 온 몸에 멍과 출혈이 발견되고 갈비뼈 15개가 부러졌다. 뇌에서도 멍과 부종이 발견되고 비장마저 파열됐다. 부검 후 국방부가 밝힌 사인은 똑같았다.

반면 부검감정서를 검토한 법의학자들과 윤 일병 사건이 이송된 육군 3군사령부 검찰부가 밝힌 사인은 ‘심한(지속적인) 구타로 인한 쇼크사’였다. 법의학자들은 “군법의관이 (시신의)손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굉장히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던 김호철 변호사는 “군에서는 사망 경위에 대한 은폐나 왜곡이 있을 수 있어 자세한 정보 없이 부검만으로 소견을 낸 부검의에게만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윤 일병 부검을 담당한 군법의관은 재판에서 “부검하기 전 피해자가 당한 폭행의 정도나 구체적 상황에 대해 몰랐다”고 증언했다. 이뿐 아니라 재판부에 제출된 부검감정서 일부가 은닉 또는 폐기됐다는 의혹도 가해자측 변호인이 제기한 상태다. 

훼손된 사건 현장, 법의학 전문가가 없는 현장 검안, 부검 결과만으로 소견을 내는 반쪽 검시 등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군은 특유의 폐쇄성까지 더해져 국민 불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이 8월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국방위원회 연석회의에서 폭행으로 사망한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의 사진을 공개하며 회의에 출석한 한민구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를 질책하고 있다. 

남제현 기자


◆의문사 의혹 많은 군 검시체계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1년간 군에서 사망한 장병은 총 4108명에 달한다. 한 해 평균 195.6명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에도 군에서 자살 등의 각종 사고로 117명이 숨졌다. 

군 병원 냉동고에는 18구의 주검과 133구의 유골이 장기보관돼 있다. 유족들이 의문사라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인수를 거부한 주검들이다. 

군 의문사 의혹이 끊이지 않는 것은 수사기관과 감정기관이 모두 군 지휘체계에 종속돼 있는 데다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 객관성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는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군내에서 변사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군사법경찰관이 수사하고 소속부대 일반 군의관이 시체 검안을 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군 검시권을 갖고 있는 검찰관(檢察官) 지휘에 따라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한다. 다만 유족이 원하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다.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법의군의관 3명이 연평균 100여건의 부검을 한다. 이들은 국과수 부검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현장검안은 거의 못한다. 대부분 의대 6년 내내 부검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채 임관해 군 입대 후에야 국과수에서 부검 훈련을 받는다. 한 군 관계자는 “강원도 부대에서 중요한 사망사건이 터져도 서울에서 갈 수 없는 게 현실이고, 법의군의관을 사건현장으로 부르려는 검찰관도 없다”고 지적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수사에서 감정에 이르기까지 독립성을 보장하기 힘든 군 사법체계라는 지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실은 “국방과학수사연구소가 실력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며 “세계 최고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 해도 법의학적 소견이 아닌 (상부)지침을 받아 처리하는 게 문제”라고 강조했다.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군에서 로스쿨 출신의 장기 군법무관을 뽑는데 큰 문제”라며 “사법고시 출신 법무관은 제한된 기간만 근무하면 됐지만, 장기 법무관들은 지휘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우려했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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