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24일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춘천호스피스 병동에서 함께 모여 윷놀이를 하고 있다(왼쪽). 박영의 원장이 이금순씨를 진찰하고 있다(오른쪽). 춘천=구성찬 기자

1부: 호스피스, 나를 위한 선택

② 그곳의 죽음은 인간적이다


“임○○ 환우가 힘들어하시더니 오전 6시23분 임종했습니다.” 간밤에 환자들이 어땠는지 일일이 상태를 점검하던 회의실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망자(亡者)는 췌장암 말기였다. 3주 전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지난달 18일 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삶의 끝자락에서 평안을 찾으려 했을 테다.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향년 70세.

지난달 24일 강원도 춘천 대룡산 자락의 ‘춘천호스피스’ 병동은 부고로 아침을 맞았다.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간호팀장은 환자들의 상태를 계속 설명해 갔다. “김○○ 환우는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였다.” “신○○ 환우는 깊이 잠들어 식사를 걸렀다.” “오○○ 환우는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말기 암환자의 마지막을 보살피는 이곳에선 죽음이 빈번하다. 대개 입원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하루걸러 임종 소식이 들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마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환자 여섯 명은 끝까지 삶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의료진도 그들의 노력을 응원하며 세심한 손길로 살폈다.

“살아서 나갈 거예요”

호스피스 병동은 드나듦이 잦다. 떠나간 자리는 금세 다른 환자가 채웠다. 최모(51)씨는 처음 찾은 호스피스 병동이 낯선 눈치였다. 눈길을 옮기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병동은 판잣집처럼 병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종합병원 다인실과 달랐다. 몸을 가눌 여유가 있었다.

최씨가 인두암 진단을 받은 건 10년 전이다. 시간의 길이만큼 투병도 지난했다. 그 정도 고생했으면, 그쯤 버텼으면 새로운 삶이 주어질 법도 한데, 지난 1월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종합병원에서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야윈 몸은 주삿바늘 하나를 허락할 틈도 없어 보였다.

한참을 서서 병동을 둘러보던 최씨는 로비 의자에 걸터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농부가 밭에 고개를 파묻고 겨우내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를 뽑고 있었다. 가까운 봄이면 감자가 싹을 틔울 것이다. 그는 병동이 자리한 이곳 동산면이 익숙했다. 옛 친구가 가까운 과수원에서 사과를 키운다고 했다.

문병 올 친구가 지척에 있어 힘이 되겠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관절개를 한 터라 말 한마디가 힘에 부쳤다. 최씨는 “살아서 나갈 거예요”라며 빙긋 웃었다. 숨이 새어 나오지 않게 절개부를 손으로 막고서야 겨우 말을 뱉어냈다.

같은 시간 최씨의 아내는 입원 상담을 받았다. 의료진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꼈다. ‘만약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건강을 되찾을 거라 믿지만’ 등 다른 말을 앞세우고서야 임종 절차를 설명했다. 아내는 “마음 단단히 먹었다”면서도 새어 나온 눈물 탓에 진즉 숙여버린 고개를 좀체 들지 않았다.



춘천호스피스는 의료진 외에도 6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주 이곳을 찾는 자원봉사자들의 이름과 사진이 담긴 명찰이 병동 한편에 걸려 있다. 춘천=구성찬 기자

“예쁘게 화장(化粧)해 주세요”

A씨(43·여)는 “목욕하기 싫다”며 자원봉사자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매주 수요일 오전 자원봉사자들이 목욕봉사를 하러 호스피스 병동을 찾는다. 제 몸을 가누기 힘든 환자들은 그날만을 기다렸다. 타인에게 몸을 맡기기엔 아직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걸까. A씨는 지난달 2일 입원 이후 한사코 목욕을 거부하고 있다. “깨끗하게 씻으면 개운할 거예요”라는 간호사의 권유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대신 “예쁘게 화장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환자들은 입원 첫날 가족, 의료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다. A씨 병상 곁에도 그날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A씨는 “화장을 하고 다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입원 첫날 마음이 편치 못해 사진이 잘 안 나왔다고 딸이 내심 신경 쓰는 듯했다”며 “딸이 ‘얼른 건강해져 봄나들이 가자’는 말을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한다”고 했다.

“놀이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점심식사 뒤엔 정월 대보름을 맞아 윷놀이 한 판이 열렸다. 김모(65·여)씨는 썩 내키지 않는다며 머뭇거리면서도 팔뚝만 한 스티로폼 윷 하나를 집어 들었다. 높이 던졌다.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각각 윷 하나씩을 나눠 들었다. ‘도’에 탄식하고 ‘윷’에 환호하고 ‘모’에 어깨를 들썩였다. 여느 명절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김씨는 “놀이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도 피어나오는 웃음까진 숨기지 못했다.

김씨는 1999년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삶은 고단했고 치료에 전념할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2012년 결국 말기 진단을 받았다. 4년간 입원과 통원이 반복됐다. 고단한 시간이었다. 웃을 여유도 없었다. 그런 그가 요즘은 조금이나마 웃는다.

자원봉사자들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피붙이마냥 살갑게 대해줬다. 서로 말벗을 자처했다. 아침드라마 내용부터 살아온 얘기까지 작은 병상에 누워서도 나눌 얘기는 넘쳤다. 간호사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구석이 있을까 싶어 늦은 밤에도 자주 안녕을 물었다.

가족과 같이, 가족처럼

환자만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남은 가족이 겪는 감정의 무게는 가늠조차 어렵다. 이금순(64·여)씨는 남은 시간을 아들(37)과 함께 지내고 싶어 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춘천호스피스는 그런 이씨에게 편히 지내라며 기꺼이 1인실을 내줬다. 중환자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했다면 누리지 못했을 일이다.

이씨는 2012년 자궁경부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동시에 6개월 시한부 선고도 내려졌다. 요양원과 복지시설에서 지내다 지난해 9월 호스피스를 찾았다. 늘 곁에 있어 주는 아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이씨는 “아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위안이 될 때가 많다”고 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여태껏 4년 가까이 살았다”면서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서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춘천호스피스는 해마다 4월과 11월이면 ‘기러기 가족 모임’을 갖는다. 호스피스를 거쳐 간 환자들의 가족이 다시 병동에 모인다. 한데 모여 밥을 먹고, 떠난 이에게 차마 못 했던 말들을 함께 나눈다. 수신자 없는 편지를 쓰기도 한다. 이 단출한 모임이 사별 가족에겐 심심한 위로가 된다.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에 위치한 춘천호스피스 전경. 1999년 설립된 이후 1000명이 넘는 말기 암환자가 이곳에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고 맞았다. 춘천=구성찬 기자

‘춘천호스피스’ 병동은 말벗에 궂은일… 60명 넘는 자원봉사자 헌신

정현근(70·여)씨는 매주 수요일 춘천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 병동을 찾아 봉사활동을 한다. 빨래가 주업이고, 안마가 부업이다. 지난 2년간 거르지 않고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젊은 환자를 대할 때면 이 병동에서 떠나보낸 동생 생각에 잠기곤 한다.

정씨의 동생은 지난해 1월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서 6개월을 보냈지만 차도가 없었다. 정씨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호스피스 병동이 떠올랐다. 동생에게 호스피스로 옮기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란 생각이 남아 있던 탓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지난해 6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뒤 두 달이 못 돼 사망했다. 정씨는 늘 동생 곁을 지켰다. 그는 “삭막한 대학병원 병실 대신 호스피스 병동을 택한 덕분에 동생이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며 “이렇게 봉사하는 동안은 사별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삭일 수 있다”고 말했다.

춘천호스피스는 1999년 이주호 소양제일교회 목사가 설립했다. 2012년 보건복지부 완화의료전문기관으로 등록됐다. 그동안 1044명이 거쳐 갔다. 더 이상 치료가 힘든 말기 암환자에게 병동의 문이 열려 있다. 입원하려면 ‘호스피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치의 소견서가 필요하다. 1개월 기준 진료비는 45만원. 가족 한 명이 환자와 함께 상주할 수 있으며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최대 환자 12명이 입원할 수 있다. 박영의 원장을 비롯해 간호사 7명, 간호조무사 2명, 사회복지사 2명이 환자를 돌본다. 의료진 외에도 60명 넘는 자원봉사자가 매주 호스피스 병동을 찾는다.

오덕영(79)씨는 교편을 내려놓은 뒤 16년째 춘천호스피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병동 주변 텃밭에서 고추와 배추, 상추를 기르는 게 그의 일과다. 무공해 채소가 환자들의 건강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까 하는 생각에서다.

오씨 역시 암환자다. 2012년 방광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당장 몸이 불편한 데는 없지만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씨는 “힘 다할 때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때가 되면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춘천호스피스는 의료진과 더불어 자원봉사자의 헌신으로 운영된다. 자원봉사자를 위한 교육도 매년 실시한다. ‘호스피스의 개괄적 이해’ ‘암에 대한 이해와 증상’ 등의 강의가 있다. 박상운 춘천호스피스 회장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의료진만큼이나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호스피스 병동의 활성화를 위해선 체계적인 자원봉사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춘천=신훈 기자 zorba@kmib.co.kr








죽음은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역설해 온 윤영호 교수는 웰다잉법이 만들어짐으로써 우리 사회가 존엄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병주 기자

가정의학전문의인 윤영호(5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익숙한 의사다. 살리는 일이 본업인 그는 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다. 윤 교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일명 웰다잉법)이 지난달 8일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의료기관 등 80여개 단체와 1만5000여명이 참여한 호스피스·완화의료 국민본부 실무 책임을 맡은 운영간사로서 의료계와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찾아다니며 법률 제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시행을 앞두고 (호스피스·완화의료는 2017년 하반기, 연명치료 중단은 2018년 상반기 도입) 보완할 점이 적지 않지만 이 법률은 ‘죽음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른바 ‘웰다잉’의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지난 15일 서울 대학로 서울대 의대 교육관 306호에서 윤 교수를 만나 이 법률의 제정 의미, 과제 등을 포함해 삶과 죽음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웰다잉이 뭔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죽음은 치료의 실패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를 받아들이고 ‘잘 죽어야 된다’는 자세로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웰다잉이다. 김 할머니 사건(2009년 5월 대법원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존엄사를 허용한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지고 기대여명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 죽음의 과정이 너무 힘들고 비참해진다는 성찰이 이뤄졌다. 특히 요즘처럼 거의 모든 환자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황망하게 마지막을 맞는 상황에서 존엄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죽음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법적 절차까지 명확히 해놓자는 실천이 웰다잉이다.”

-웰다잉 법률의 제정 의미는.

“의료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까지 의료는 질병을 극복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췄으나 이 법은 인간 중심의 ‘돌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의료의 기능을 수정한 것이다. 나아가 죽음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같이 맡아야 한다는 의미를 법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제나 보완할 점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가장 아쉬운 점은 시민의 자발적 동참 등을 유도하는 조직을 만드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법이 통과됨으로써 얼개는 짜였다. 그러나 효과를 거두려면 시민 등 민간 부문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돈과 제도만으로는 웰다잉의 철학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론 조성, 캠페인 확산 등 민간의 역할을 결집할 재단법인 같은 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국회 상임위 통과 과정에서 이 근거가 삭제됐다. 원래 있었는데 아마 ‘위인설관’을 우려해 뺀 것 같다. 정부에서 앞으로 보다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법률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는 당초 호스피스 부문에는 소극적이었다. 국정과제로 선정했던 연명의료 파트에만 관심을 보였다. 호스피스 관련 내용이 법률에 포함된데는 국회의원들의 노력이 컸다. 특히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원혜영 의원이 많이 도왔다. 김 의원의 경우는 18대 국회 때 발의한 내용이 폐기되자 19대 때 재발의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호스피스는 뭐고 왜 중요한가.

“호스피스는 삶에 대한 통제권과 의사결정권을 의사가 아닌 환자 본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세 측면에서 호스피스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신체적으로는 통증을 완화하고 정신적으로는 삶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하게 한다. 사회적으로는 과도한 의료비 부담을 덜게 하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 또는 실존적 의미다. 불안하고 두렵게 여겼던 죽음을 준비하게 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호스피스와 관련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흔히 호스피스를 연명치료 중단으로 여기는데, 아니다. 완화치료를 받게 되는데 이 경우 생존기간이 늘고 특히 항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는 삶의 질과 생존율 향상에 상당한 효과가 나타난다. 경험에 의하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시점보다 조금 일찍 호스피스를 이용한 환자들은 본인 스스로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 더 좋은 결과를 드러낸다. 기대여명이 1년 정도 남았을 때 호스피스를 시작할 것을 권한다.”

-국내 호스피스 실태는.

“양과 질 모두 열악하다. 대체로 인구 100만명당 50병상 정도의 호스피스 병상이 적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2500병상 정도가 있어야 하나 우리나라는 1000병상 조금 넘는데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선제적 완화의료 등 질적인 부분은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2020년까지 병상을 1400개로 늘린다고 했는데.

“당연히 늘려야 한다. 다만 숫자에 너무 연연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호스피스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 곳에까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병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현재 종합병원 등 상급병원들도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은 실정이다. 증설 못지않게 내실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 호스피스를 허용하면 자칫 ‘현대판 고려장’을 늘린 것이란 비난이 나올 수도 있다. 세밀하게 따져야 한다.” 

매년 국내에서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 7만5000명 중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13.8%, 전체 사망자 대비 3.3%에 불과하다. 영국은 95%, 미국과 대만은 각각 44.6%, 30%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의 59%가 호스피스 이용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또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자료를 보면 말기 및 진행 암 환자 89%가 가정호스피스를 원했다.





-병상 확충보다 가정호스피스를 중점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3월 2일부터 가정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범사업이 시행되는데 보완점은 뭔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가정형, 병동형, 자문형으로 나뉜다. 이 중 가정형이 여러모로 이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가장 원하고 건물 신축 등 시설 투자를 하지 않아도 돼 건보재정 측면에서 유리하다. 이 분야가 활성화되면 의료 보조인력 충원 등 고용창출 효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의사 등 전문 인력의 서비스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데 현실적 고민이 적지 않다. 당장 가정방문을 의사가 할 경우 이에 따른 부담, 병원 사정 등을 고려해야 한다. 사고와 제도 등 모든 것이 환자 중심으로 전환돼야 걸맞은 효과를 얻는다. 아마 시범 시행 과정에서 손봐야 될 내용이 많이 드러날 것이다.”

-서울대병원, 세브란스 등 이른바 ‘빅5’가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인색하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적 책임에 너무 소홀한 것 아닌가.

“수익성이 낮으니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병원을 탓하는 것 못지않게 시스템이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예를 들어 상급병원들은 말기 환자들을 위한 단기 입원 병동을 세우려는 계획을 짜고, 정부는 일종의 공공 투자인 이런 시설에 지원을 해야 한다. 단기 입원 병동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능을 맡으면 환자의 연명치료가 줄고 이는 결국 건보재정에 득이다. 과도기적으로는 큰 병원들이 우선 임종실부터 만들 필요가 있다. 지금은 거의 중환자실에서 옆의 환자와 보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질은 고사하고 환자와 가족의 프라이버시조차 지켜지지 않는 지경이다.”

-외국의 경우 자원봉사자와 기부금이 호스피스 운영의 원동력인데.

“영국은 호스피스가 가장 앞선 나라다. 거의 모든 국민이 무료로 이용한다. 2000년에 호스피스 제도를 법제화한 대만도 잘하는 편이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호스피스를 우리의 품앗이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다음에 내가 도움을 받는다는 식이다. 자연스레 자원봉사와 기부가 활성화된다. 정부가 큰 틀을 짜면 민간이 실천하는 이런 흐름이 당연히 바람직하다.”

-말기 환자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족의 경우 우선 말기임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환자와 가족 모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변에 말기 환자가 있으면 병문안을 가 감사 인사를 전한다든지,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든지 등 대화를 통해 환자와 나의 교류를 재확인하는 게 좋다. 경험에 의하면 이럴 때 대부분의 환자들이 즐거워한다. 단 너무 늦게 찾아가면 환자가 힘들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왜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됐나.

“중1 때 누님이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고민했다.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재수를 해 의대에 진학했다. 전공을 뭐로 할까 선배들에게 상의했더니 가정의학이 가장 적합하다고 조언해주더라. 전공의 입국식 때 인사를 하며 ‘호스피스 하러 왔다’고 했더니 모두 웃더라.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는 성직자들이나 간호사들이 전담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다.” 

◆ 윤영호는

△서울대 의대 졸업, 석·박사 △국립암센터 사회사업호스피스 실장 △미국MD 앤더슨 암센터 객원교수 △서울대 의대 건강사회정책실장 △서울대 의대 암통합케어센터 및 완화의료센터 교수 △저서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5·공저)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2014)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2012)


만난 사람=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1부 : 호스피스, 나를 위한 선택

① 삶의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


내 집만큼 편한 곳은 없다. 익숙한 공간, 낯익은 냄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집에서 돌봄을 받다 임종하는 경우 환자와 가족 모두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여러 차례 제시됐다.

2010년 미국 학술지 ‘임상 암 저널’에 말기 암 환자 342명과 그 사별 가족을 연구한 논문이 실렸다. 집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으며 임종한 환자는 병원 입원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임종한 경우보다 삶의 질, 신체적 편안함, 심리적 안녕 등 모든 지표가 월등히 높았다.

사별 가족이 겪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비율도 집에서 임종한 경우 4.4%로 병원 임종(21.1%)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가족이 사별 후 일상에 복귀하지 못하는 ‘장기간 애도 장애’를 겪을 확률도 병원(21.6%)보다 집(5.2%)이 훨씬 낮았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연구팀도 최근 ‘BMC의학저널’에 비슷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생의 마지막 날을 집에서 보내면 환자는 물론 가족도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단,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면 몇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봤다. 그 필요성에 환자와 가족이 모두 동의해야 하고, 통증을 줄여줄 간병이 가능해야 한다.

집에서 임종하는 경우 의료비용도 적게 든다. 서울대 의대 윤영호 교수는 “대만의 호스피스 비용·효과 분석 연구를 보면 전통적인 병원 치료 대신 병원호스피스를 택한 경우 사망 전 1개월간 의료비용이 64.2% 줄어들고, 가정호스피스는 병원호스피스의 절반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들도 임종 장소로 ‘내 집’을 선호했다. 2012년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말기 및 진행 암 환자 465명을 조사했더니 75.9%가 돌봄 장소로 ‘가정’을 택했다. 그 이유(복수응답)로는 ‘익숙한 장소가 주는 안정감’(88.9%)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72.4%) ‘경제적 부담이 적어서’(51.4%) 등을 꼽았다. 또 89.1%는 ‘가정호스피스 이용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일반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2014년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500명을 조사한 결과 57.2%가 임종 장소로 자택을 선택했다. 호스피스완화의료기관(19.5%) 병원(16.3%) 요양원(5.2%)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지 않다. 간병할 사람이 없어 입원을 택하고, 많은 말기 암 환자가 요양시설에 머문다. 말기 암 환자의 병동호스피스 이용률도 13%(2014년)에 불과하다. 암 환자의 89.2%(2013년)는 여전히 병원에서 임종하고 있다.

유럽과 북미 국가의 대부분은 호스피스 서비스 가운데 가정호스피스가 90% 이상을 차지한다. 대만과 일본도 가정호스피스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호스피스 제도는 2003년부터 ‘병동호스피스’ 중심으로 시행돼 왔다. 지난해 말에야 ‘암관리법’ 개정으로 가정호스피스가 제도화됐다. 다음 달 2일부터 가정호스피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시범사업이 서울성모병원 등 17개 기관에서 시작된다. 환자 집에 찾아가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의 방문료와 교통비 등을 진료비(일당 정액제)로 책정해 지원한다. 그동안은 병동호스피스를 갖춘 일부 의료기관이 기부금 등 자체 비용을 들여 운영해 왔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김은숙 충남대병원 호스피스 간호사(왼쪽)가 16일 대전 선화동 박경숙씨 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담관암 말기였던 박씨의 시어머니는 지난해 8∼10월 충남대병원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집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오른쪽 사진은 가정호스피스로 위암 말기 남편을 돌보다 떠나보낸 대전 가장동 이규정씨가 김 간호사와 가족 앨범을 보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 대전=김지훈 기자

충남대병원은 대전시의 예산 지원을 받아 원하는 환자에게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무상 제공하고 있다. 간호사 3명이 10∼20명 환자 가정을 주 2∼3회 직접 방문해 치료와 심리 상담을 한다. 환자가 사망해 공식적인 호스피스 기간이 끝나도 김 간호사처럼 주기적으로 보호자의 집을 찾아 유족의 마음을 달래준다. 

“꽃방석에 앉았다 간다”

유씨는 지난해 5월 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치료는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박씨와 남편이 교대로 병원에 머물며 간병했다. 낯선 병원 밥을 힘들어하던 유씨를 위해 세 끼를 집에서 만들어 날랐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여서 면회가 금지되자 유씨는 “왜 다른 가족은 보이지 않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모습을 본 가족들은 가정호스피스를 결심했다.

박씨는 “석 달 만에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간 뒤에야 한숨 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평소 먹던 반찬으로 상을 차리자 병원에서 식사를 거부하던 유씨가 조금씩 죽을 먹기 시작했다. 남들 눈치 볼 필요가 없어 목욕도 편해졌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다 집 침대에서 푹 쉬니 간병생활이 덜 피곤했다. 담즙 주머니와 수액 등은 김 간호사가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와 관리해줬다. 입원했을 때와 똑같은 서비스였다.

무엇보다 함께 산 지 1년밖에 안 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됐다. 박씨는 “용기를 내서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하고 안아드렸어요. 병원에 있었으면 남 눈치 보느라 쑥스러워 못했을 거예요.” 유씨는 지난해 10월 집에서 숨을 거뒀다. 임종 전 박씨 손을 잡고 “내가 꽃방석에 앉았다 간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호스피스 서비스는 계속되고 있다. 박씨는 장례를 치른 뒤 가족들이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내는 과정을 겪었다. 김 간호사의 조언으로 가족끼리 감정이 폭발할 때 잠시 자리를 피하는 지혜가 생겼다고 했다. “가정호스피스는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를 위한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본 마지막

김 간호사가 두 번째로 간 곳은 가장동의 한 주택이었다. “우리 양반이 이 방에서 임종을 했어. 그래선지 이 방에 들어오면 아직도 함께 있는 것 같아.” 앨범을 꺼내 생전 남편의 모습을 넘겨보던 이규정(81)씨가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공직에서 보낸 남편 김모(사망 당시 81세)씨는 3년 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이듬해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이씨는 주저 없이 남편을 집으로 데려온 뒤 충남대병원에 가정호스피스를 신청했다.

이씨는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나도 허리가 아파 병원에서는 도저히 모실 수 없었다”며 “40년 넘게 산 이 집에서 편하게, 내 손으로 마지막을 준비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김 간호사는 지난해 6월부터 두 달간 15차례 이씨 집을 방문했다. 다리 마비에 의한 배뇨 장애와 통증 관리를 주로 했다. 거실에 작은 풀장을 설치하고 간호사와 이씨, 자녀들이 함께 김씨를 목욕시켰다. 간병인과 자원봉사자도 도왔다.

이씨는 남편이 떠난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지난해 8월 셋째아들이 먼저 안방 침대에서 아버지 상태를 확인한 뒤 식구들이 모두 시신을 확인했다. 평생 살던 집에서 맞는 편안한 죽음이었다. 이씨는 “무섭지 않았다”며 “오히려 편하게 떠난 남편을 보니 여한이 없다”고 했다. 이후 이씨가 장에 나가 직접 사온 수의를 입히고 장례를 치렀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본 아이들은 김 간호사와 함께 찾아온 미술치료사의 상담도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이씨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남편이 몰래 녹음해둔 음성 유언이 담겨 있었다. “얘들아 잘 들어라. 혼자 된 어머니 잘 모셔라….” 눈물을 흘리던 이씨는 “그래도 이 양반이 집에 누워 있었으니 이런 거라도 했지. 병원이었으면 이런 흔적도 못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삶의 마지막을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준비하는 가정호스피스 건강보험 시범사업이 다음달 2일 시작된다. 서울성모병원 가정호스피스팀 자원봉사자 남명희씨가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다가구주택을 방문해 위암 말기인 김모 할머니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 김지훈 기자

서울 용산구의 한 다가구주택 4층 집에 지난 15일 서울성모병원 혈액종양내과 이경식(73) 명예교수가 들어섰다. 김인경(41·여) 간호사와 자원봉사자 남명희(53·여)씨가 동행했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핼쑥한 얼굴로 안방 침상에 누워 있던 김모(85) 할머니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김 간호사는 손을 꼭 잡으며 “진지는 드셨고? 불편한 데는 없어요?”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딸 고모(51)씨는 “통증이 오면 진통제 먹고 주무시기만 한다”고 했다. 심할 때는 몸에 통증 패치를 붙인다. 김 간호사는 팔에 꽂힌 영양수액을 체크했다. 혈압을 재고 욕창은 없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그 사이 남씨가 다리 마사지를 시작했다. 혈액순환이 안 돼 부어 있는 다리를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내곤 계속 주물렀다.

할머니는 이 집에서 40년을 살았다. 군인이었던 남편과 평생을 바쳐 일군 삶의 공간이다. 구석구석 남편의 체취가 있다. 지난해 10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병원에서 “더 이상 해드릴 게 없다”고 말했을 때 할머니는 “집에 가겠다”고 했다.

40년을 산 집에서…

할머니의 암이 발견된 건 3년 전이다. 이미 위암 4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간에도 퍼진 데다 암 덩어리가 위와 대장 연결 부위를 막고 있어 수술도 위험했다. 살고 싶었다. “항암치료를 해보자”는 의사의 말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할머니는 암과 싸웠다. 2년간 60여 차례 독한 항암치료를 버텨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9월 마지막 항암치료가 끝난 뒤 의사는 “길어야 3개월, 짧으면 한 달입니다. 호스피스를 알아보시죠”라고 했다. 억울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 정도로 생각했다.

가족들은 입원이 가능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봤다. 그런데 할머니는 “병원은 무섭다”며 한사코 “집에 가자”고 했다. 딸 고씨는 “암 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옆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치고 끙끙거리는 걸 보셨다.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삶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응급상황이 오더라도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같은 연명치료를 일절 하지 말라고 가족에게 당부했다.

고씨는 “솔직히 집에서 어떻게 보살필지 걱정이 많이 됐다”고 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거동이 불가능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고씨 가족은 할머니 집 아래층에 살면서 간병하고 있다. 주말마다 언니 가족이 찾아온다. 고씨는 “거동하실 수 있을 땐 같이 여행도 다니곤 했다. 이제 평안히 보내드리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들은 지난해 11월 가정호스피스의 문을 두드렸다. 통증 완화, 욕창 관리 등 말기 암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와 간호는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가정호스피스팀의 도움을 받는다. 가정호스피스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기대여명 6개월 안팎의 말기 암 환자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입원을 대체할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다. 

찾아가는 호스피스, 아름다운 동행

호스피스 자원봉사 5년째인 남씨는 “다른 봉사자와 함께 2주에 한 번씩 와서 샴푸와 마사지를 해드리는데 할머니가 무척 시원해하신다”며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러드리면 할머니 얼굴이 편안해 보여 좋다”고 말했다.

김 간호사는 가정호스피스 경력 6년의 베테랑이다. 현장 경험이 풍부해 의사 왕진이 필요한지, 병동에 입원해야 하는지, 임종 순간이 임박했는지 가늠한다. 그를 비롯한 간호사 2∼3명이 번갈아 주 2회 할머니를 찾는다. 보호자와 전화 통화는 수시로 이뤄진다. 이번에도 할머니 상태에 대한 의료적 판단이 필요해 이 교수와 함께 왔다.

이 교수가 왕진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할머니 가슴에 댔다. “숨을 크게 쉬어 보세요…아이고, 좋으시네.” 이번엔 손으로 아랫배를 만져보더니 “변이 좀 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씨는 “사흘에 한 번씩 (대변을) 본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교수는 “관장이 효과 없으면 약국에서 둘코락스를 사서 드시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곤 할머니에게 고씨 칭찬을 했다. “좋은 따님 두셨네요. 효녀를 두셨어. 간병도 잘 하고….” 할머니 입가에 미소가 잠시 번졌다. 고씨는 “엄마를 위해 한달음에 와준 분들이 정말 고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음을 정복 대상으로 착각”

이 교수는 1988년 서울성모병원에 국내 첫 ‘병동 호스피스’가 생겼을 때부터 말기 암 환자들과 함께해 왔다. 한국 호스피스의 선구자다. 2008년 은퇴 후에도 1주일에 두 번씩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에서 환자들을 살핀다.

이 교수는 “말기 암 환자가 통증과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많이 봤다. 마지막 삶을 가장 아름답게, 여한이 없도록 해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호스피스는 단순히 신체적 돌봄에 그치지 않는다. 가족과 삶에 관한 영적 돌봄까지 제공한다. 물론 환자의 종교를 존중하며 이뤄진다.

“60, 70년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가족이 다 모여 작별인사도 하고 집에서 모셨어요.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 그게 의학이 발전하면서 변질된 거죠. 죽음을 정복 대상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방식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교수는 “살 수 있는 병은 치료하는 게 맞다. 하지만 말기 환자는 치료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의미 있게,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도리”라고 했다.

“호스피스는 뜻있는 몇몇이 하는 게 아니라 국가적 사업입니다. 복지국가의 역할이에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가정호스피스가 더욱 활성화돼야 합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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