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범죄나 사고 현장에 출동해 관련 증거를 채취하고 범죄 단서를 찾는 경찰 과학수사요원들이 정작 자신들의 안전에는 소홀해 각종 안전사고나 질병 발생 등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3일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에서 지난해 5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전국 16개 지방경찰청 및 일선 경찰서에 근무하는 과학수사요원 971명과 검시관 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업무 중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45.9%에 달했으나 이들 가운데 적절한 부상 치료를 받은 사례는 27.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회성 부상이 아닌 지속적인 업무 수행 과정에서 질병이 발생했다고 답한 응답자도 29.2%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66.7%는 과학수사 업무에 투입된 이후 얻은 질병이라고 답했다.

다수의 과학수사요원들이 업무 수행 과정에서 안전사고 및 질병 발생 위협에 처해 있지만 근무부서에 안전수칙 등 관련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27.4%에 불과했으며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답한 요원들 가운데서도 이를 숙지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40%에 그쳤다. 

또 과학수사요원들에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각 지방경찰청에서 실시하는 안전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54.7%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각종 감염원에 노출될 수 있는 사건 현장에서도 제대로 된 안전장비를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 중 17.3%만이 사건 현장에서 라텍스 장갑을 사용한다고 밝혔고 장화를 신지 않는다고 밝힌 응답자도 44.1%에 달했다. 보호복을 입지 않는다는 답도 36.5%를 기록했다. 

증거분석실에서도 안전장비 활용은 미흡해 마스크를 쓰고 작업한다는 응답자는 5.8%에 그쳤으며 살균소독기(6.1%)나 고글(9.1%) 등을 활용하는 응답자도 매우 적었다. 

범죄 전문가들은 방독마스크나 환기장치 등 안전장비 없이 범죄 현장에 노출될 경우 호흡기질환 등 각종 질병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설문에 응한 경찰 과학수사요원들은 안전사고나 질병 발생 예방을 위해 가장 시급한 조치로 정밀건강검진(45.9%)과 안전장비 보강(27.8%) 등을 꼽았다. 정진성(경찰행정학) 순천향대 교수는 “경찰청 주도로 안전에 관한 표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보급하고 철저한 안전교육이 이뤄져야 제대로 된 과학수사 역량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연 기자 leewho@munhwa.com








혈흔패턴 수사로 푼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

현장에 남은 핏자국(혈흔)의 유형(패턴)을 분석한 과학수사로 대전 경찰이 7개월 만에 살인범을 붙잡았다는데….혈흔 패턴 수사 결과가 법원에서 유죄 증거로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유력한 용의자 범행 부인에

현장 혈흔 주목해 DNA 분석

핏방울 위치로 범행동선 그려

“피해자 둘이 싸웠을 가능성 0

범인은 옆집 남자입니다”


# 참혹한 아파트, 원점을 맴도는 수사

“여기 판암동 ○○아파트인데요, 사람이 죽었어요.”

지난해 4월4일 새벽 1시21분, 대전 119 상황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원룸형 아파트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벽과 천장, 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이불 위에 집주인 김아무개(58)씨와 이웃 ㄱ(53)씨가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심하게 맞아 얼굴 등이 으깨진 상태였다. 옆에는 굵은 전선을 자르는 절단기가 놓여 있었다. 김씨는 이미 숨진 뒤였고, ㄱ씨는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0여일 뒤 숨졌다.

신고자는 이아무개(51)씨. 그는 “김씨 등과 화투를 하는데 김씨와 ㄱ씨가 심하게 다퉈 이를 말렸다. 두 사람의 피가 묻어 김씨 집 조리대에서 손을 씻은 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김씨 집에 와보니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대전 동부경찰서는 숨진 김씨 등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사와 행적 등을 탐문했다. 아파트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 녹화영상을 분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김씨와 ㄱ씨는 4월3일 밤 10시부터 주검이 발견된 4일 새벽 1시21분 사이에 절단기로 각각 80여차례, 10여차례 맞은 것으로 추정했다. 범행 시간대에 김씨 집에 드나든 사람은 신고자 이씨뿐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씨는 “내가 집에 다녀온 사이 둘이 다시 싸우다 서로를 해친 것”이라며 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현장에 있던 3명 가운데 2명은 숨졌고 다른 1명은 이씨뿐이었지만, 경찰은 직접 증거나 범행 동기를 찾지 못했다. 수사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 혈흔을 분석하다

경찰은 다시 범행 현장을 주목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혈흔패턴 수사 전문요원인 과학수사계 허강진 경사를 투입했다. 허 경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남경찰청의 혈흔패턴 수사요원 등 3명으로 팀을 꾸린 뒤 현장을 다시 살피고 사진 수천장과 감식자료를 분석했다. 유전자(DNA) 분석으로 김씨와 ㄱ씨의 피를 가렸다.

허 경사팀은 4개월여 동안 어지럽던 현장의 핏방울 수천개가 왜 피해자들의 몸을 떠나 벽과 천장에 점과 선으로 남게 됐는지, 이불과 방바닥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분석했다.

김씨의 피는 방 안 왼쪽 벽 위에서 시작돼 점점 방바닥에 가깝게 내려와 뿌려졌고, 오른쪽 유리문에 묻은 피는 흉기에 묻었다가 휘두를 때 떨어져나간 흔적이었다. 김씨가 이불 위에 쓰러진 뒤에도 피의 흔적은 계속 나타났다. 범인이 왼쪽 벽 쪽에 서 있던 김씨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김씨가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을 때는 물론 이불에 쓰러진 뒤에도 타격을 가했다는 범행 동선이 완성됐다.

ㄱ씨는 방문에서 타격을 당한 뒤 의식을 잃고서 문에 기대앉은 자세에서 피를 흘리다 김씨 옆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됐다.

혈흔으로 범행 동선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과학 원리를 동원했다. 낙하해 둥글게 형성된 핏방울은 만유인력(중력)의 법칙, 맞아서 분출된 핏방울과 흉기에 묻었다 날아간 핏방울은 분출 압력과 포물선 공식, 관성의 법칙 등이 적용됐다. 피들의 증언은 끝났다.

# 진실 공방-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경찰은 범행 시각을 지난해 4월3일 밤 10시로 추정했다. 옆집 사는 ㅅ씨가 드라마를 보는데 ‘악’ 하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 진술에 따라, 드라마 방영 시간대와 장면을 확인했다. 폐회로텔레비전 영상에 이씨가 숨진 김씨 집에서 나온 시각은 밤 10시24분이었다.

숨진 김씨의 옷에서는 김씨, ㄱ씨의 옷에서는 ㄱ씨의 혈흔만 나타났다. 피해자들의 발바닥은 깨끗했다. 평소 김씨는 다리가 불편했고, ㄱ씨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다. 경찰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했다면 옷에 상대의 피가 튀었을 것이고 방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밟아 발바닥에 피 얼룩이 남았을 것이므로, 둘이 서로를 해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냈다.

반면 신고한 이씨의 옷에서는 김씨와 ㄱ씨의 혈흔이 모두 나왔고, 피해자의 피부조직 조각도 확인됐다. 이씨의 모자에도 피해자들의 피가 스며든 흔적과 위에서 떨어진 핏방울 등이 발견됐다. 피가 묻은 양말의 안쪽에서 채취한 각질은 이씨 것이었다. 그가 집에 갔을 때 신은 슬리퍼 안의 혈흔도 피해자들의 것이었다.

경찰은 이씨가 김씨와 ㄱ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김씨를 살해하고 ㄱ씨에게 상해를 입혔으며, 범행 과정에서 벗겨져 방바닥에 떨어진 모자에 피해자들의 피가 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씨가 범행 뒤 귀가해 옷을 빨고, 피 묻은 모자를 버린 뒤 다시 김씨 집으로 돌아와 신고한 것으로 결론냈다.

# 과학수사 결과 점차 위력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해 피고인 이○○을 징역 17년형에 처합니다.”

지난 1일 오후 대전지법 형사12부(재판장 안병욱)가 선고했다. 형사재판에서 처음으로 혈흔 형태 분석 결과가 증거로 인정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하고도 반성하지 않고 있고 유가족들과 합의하려 노력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범행이 우발적이고 동기도 드러나지 않은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무죄를 주장하며 국민참여 재판을 신청했으나 배심원 9명도 모두 유죄 평결했다. 이씨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 재판부를 바라봤다. 유가족들은 “저런 ××를 살려둬?” “이게 뭐야?”라며 격앙했다.

허강진 경사는 “과학수사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범인을 붙잡는 중요한 수사기법이다. 법원이 혈흔 패턴 분석 결과를 결정적인 증거로 인용해 보람을 느낀다”며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씨는 항소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물리법칙 활용 범행순간 재현

혈흔패턴 수사는


혈흔패턴수사는 물리학 법칙을 활용해 범행 지점과 피해자, 가해자의 움직임 등을 분석해 범행 당시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혈흔 수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경>에 있다. 창세기 ‘카인과 아벨’의 내용이다. 여호와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실을 부정하자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는데…’라고 말한다.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혈흔은 움직임이 없다. 피가 누구 것인가 밝히는 수준을 뛰어넘어 범행을 재현해내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혈흔 형태 분석은 검증된 과학 원리와 범죄수사가 결합된 최신 수사기법이다. 이 분석 결과가 법정 증거가 되려면 높은 전문성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방향·형태 다 다른 혈흔 추적

가해자와 피해자 움직임 그려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혈흔은 낙하 혈흔, 이탈 혈흔, 충격 혈흔, 형태 전이 혈흔, 고인 혈흔 등이다. 낙하 혈흔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둥글게 퍼지고 주변에 태양 흑점 같은 모습이 남는다. 이탈 혈흔은 범행 도구에 묻은 피가 도구의 움직임에 따라 벽 등에 뿌려진 것이다. 궤적이 여러 개 남아 있다면 그만큼 범행 도구를 휘둘렀다는 의미다. 혈흔 분석은 범행의 패턴을 짐작하는 증거가 된다.

이 수사 기법은 2002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표준화했다. 국내에서는 2008년 과학수사요원을 대상으로 교육이 시작됐다. 현재 혈흔패턴수사 전문요원은 각 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1명씩 배치돼 있다. 2010년 한국혈흔형태분석학회가 꾸려졌고 2011년에는 현장 실무자 중심의 연구모임(WGBPA)이 출범했다. 


송인걸 기자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즌 1’을 마치며…]

지난해 4월 16일부터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라는 타이틀로 과학수사 시리즈물을 연재해 왔습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특집지면을 구성했던 12월 넷째주를 제외하고는 총 35회를 한 주도 빠짐없이 게재했습니다. 시리즈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전체 시리즈가 서울신문 홈페이지(www.seoul.co.kr)에서만 4000만건 이상의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인터넷포털, 블로그, 카페 등을 통한 페이지뷰까지 포함하면 최근 일간지 연재물로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시리즈는 이번 36회를 마지막으로 ‘시즌1’을 마칩니다. 좀 더 치밀한 구성과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면 다시 ‘시즌2’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부족한 기사에 보여 주신 독자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에 감사 말씀 드립니다.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유영규 드림 whoami@seoul.co.kr





2000년 6월 6일 오전 10시 20분 서울 성북구의 한 동네에서 고모(38)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집에서 발견된 시신 옆에는 먹다 남은 소주와 막걸리 병 등이 뒹굴고 있었다. 가족들은 평소 고씨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간경화를 앓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고씨가 지병 악화로 숨졌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검안을 한 동네 의사는 타살 흔적이 없다고 밝혔다. 겉으로 보기에 몸에 흉터가 없었고, 현장에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할 만한 흉기도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 부산진경찰서에 한 남자가 “사람을 죽였다.”며 찾아왔다. 고씨와 알고 지내던 김모(43)씨였다. 그는 경찰에서 “술친구로 지내온 고씨가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화가 나 전선으로 목을 졸랐다.”고 자백했다. 그는 “흉터가 남지 않도록 목에 라면박스 조각을 대고 목을 졸랐다.”면서 “범행에 사용한 목장갑과 라면박스는 지문이 묻은 것 같아서 들고 나왔다.”고 실토했다.

결국 사건을 해결한 것은 탐문수사도, 과학수사도 아닌 범인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양심이었다. 고씨의 죽음처럼 살인사건이 자연사나 병사로 처리되는 일은 얼마나 자주 일어날까. 극히 이례적일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고씨 사건의 경우 부검을 했다면 상황이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설골이나 갑상연골의 골절 여부를 살펴보거나, 후두덮개나 성대문의 점상출혈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타살인지 자연사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안과정에서 타살의 흔적이 없으니 굳이 부검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 판단은 철저히 비(非)전문가들에 의해 내려졌다. 

되짚어볼 점은 그대로 묻힐 뻔한 고씨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허술한 검시(檢屍)제도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이다. 검시란 시체를 원형대로 검사하는 검안(檢眼)과 해부를 통해 사인을 규명하는 부검(剖檢) 두 가지를 의미한다. 검안은 부검의 전제 조건이다. 부검을 위해선 검안 소견이 필요하고, 또 부검을 할지 안 할지도 검안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변사사건의 처리과정을 보자. 경찰에 사망자 신고가 접수되면 먼저 지구대 직원이 출동해 현장을 확인한 후 경찰서 본서에 보고한다. 출동한 형사(형사과나 강력반)들은 현장 상황과 최초 발견자 등을 상대로 조사한다. 이때 검안을 맡는 것은 그 지역 개업의사인 공의(公醫)들이다. 

현장에 나갈 때도 있지만 시신을 병원으로 이송하고 검안하는 일도 많다. 공의들은 현장 조사를 맡았던 형사의 의견을 참조해 시체검안서를 작성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변사사건 보고서가 만들어지면 이를 바탕으로 검사가 부검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결정한다. 대부분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진행되지만, 의대 법의학 교실이나 지역병원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문제는 부검까지 가는 일련의 과정에 법의학적 전문가가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초기 현장에 나가는 형사와 마지막 부검 결정권을 쥔 검사는 아무리 베테랑일지라도 전문적인 법의학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시체검안서를 쓰는 의사가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의대에서 받는 법의학 교육은 불과 1학점짜리 교양과목 정도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성형외과를 찾아 심장질환을 묻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검시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전국적으로 부검할 수 있는 전문 검시 인력은 국과원과 대학을 통틀어도 40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부검 건수는 연간 4600건. 부검만 하더라도 손이 달리는 상황이다. 법의학계에서는 300명 정도의 검시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요원하기만 하다.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근대적인 악법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우보증(隣友保證)제다. 예전에 의사가 드물던 시절, 동네 사람 몇몇이 보증을 서면 죽은 사람을 그냥 땅에 묻어도 좋다고 허가한 제도다. 이 제도 때문에 한 해 1만 7000명이 아무 확인절차 없이 사망처리된다. 이는 범죄에도 악용된다. 이웃의 보증만으로 자연사 처리될 뻔했던 2009년 4월 충남 보령 청산가리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검시제도와 관련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필요성은 모두 인정하지만 문제 제기만 벌써 16년째다. 웃지 못할 것은 검찰과 경찰의 힘겨루기이다. 개혁의 필요성은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운영은 반드시 우리 부처에서 해야 한다는 논리다. 난센스다.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죽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 분명치 않은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맞는 이도,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리는 일도 없어야 한다. 범죄는 흔적을 남기지만 주검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시신 속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과 이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는 사회라면 범죄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whoami@seoul.co.kr





2005년 2월 17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 유치장. 남다른 미모의 20대 여인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옷부터 반지, 구두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여자는 유치장보다는 도심 번화가가 더 어울릴 법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하던 그녀는 거품을 물고 픽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형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녀를 둘러메고 병원으로 뛰어가기를 몇 차례. 병원에선 몸에 이상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인근 화상(火傷) 전문 병원 계단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다 붙잡힌 Y(당시 27세)씨였다. 형사들의 눈에 Y씨의 행동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멀쩡한 여자가 병원에 휘발유를 뿌린 점도, 줄곧 꾀병을 부리는 것도,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형사가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남동생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저…형사님, 누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죽거나 다쳐요.”

남동생에 따르면 Y씨의 주변엔 몇 해 전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녀는 최근 5년 동안 두 차례 결혼을 했지만 남편들이 얼마 못 가 모두 세상을 떴다고 했다. 죽기 전 두 명 모두 시력을 잃었고 병을 얻었다. 집엔 불까지 났다고 했다. 불행을 겪은 누나가 고향집으로 쉬러 오자 악몽은 가족에게 번졌다. 어머니, 오빠가 차례로 눈이 멀었다. 고향집에도 불이 났다. 최근엔 집안일을 해 주던 아주머니 집에 신세를 졌는데 그 집 역시 불이 나 아주머니 남편이 사망하고 다른 가족들도 다쳤다고 했다. 동생 말대로라면 정말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저주받은 캐릭터였다. 그녀에게 몸쓸 액운(厄運)이 든 걸까. 형사들은 그녀의 가족들이 사는 강원도로 향했다. 

남동생 말대로 어머니와 오빠는 실명한 상태였다. 2003년 7월과 11월 각각 6개월 사이를 두고 모자에게 갑작스러운 안질이 찾아왔다. 병명은 안와 봉와직염. 눈 주변이 뭔지 모를 세균에 급성으로 감염돼 시력을 잃은 것이다.

“딸이 석류주스를 내왔는데 그걸 마시고는 멍해졌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그 후 눈을 떠도 앞이 안 보이더라고요.” 

“오랜만에 집에 온 여동생이 술 한 잔 하자며 술을 내왔어요. 몇 잔 마셨을까. 그 후엔 기억이 없어요. 한참을 자고 일어나 눈을 떴는데 앞이 안 보였어요. 병원이더군요.”

그러나 노모도 오빠도 수상한 우연에 왠지 말끝을 흐렸다. 의식적으로 의심을 거두려는 듯했다. 가족이란 이유에서였다.

형사들은 미스터리와 같은 남편들의 죽음과 잇따른 가족의 실명, 이와 관련된 병원과 보험기록들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죽은 남편들 역시 사망 전에 원인 모르게 실명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을 실명시킨 병도 똑같은 봉와직염이었다. 실명 후 첫 번째 남편은 뜨거운 기름에 의해, 두 번째 남편은 갑작스러운 화재에 화상을 입었다. 그때마다 여인에겐 어김없이 보험금이 쌓였다. 상해부터 사망까지 맞춤형 보험을 들어 놓은 덕이었다. 보험금만 무려 6억원이 넘었다. 형사가 아닌 누구라도 그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를 추궁할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그녀는 “불치병을 앓는 세 살배기 아들을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구속 적부심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수사팀은 담당 판사를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살인 용의자로 위험인물이니 수사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잡아 놓아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황 증거만으로 그녀를 잡아 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재판부는 그녀를 풀어 줬다.

그녀가 나오자 악몽이 반복됐다. 이번엔 자기 아들과 같은 병실에 입원 중이던 환자의 20대 보호자가 갑자기 실명했다. 실명 전 그녀는 Y씨가 건넨 다이어트 약을 먹었다고 증언했다. 그 사이 Y씨 아들의 병원비 900여만원이 실명한 여성의 신용카드로 결제됐다. 게다가 그녀는 또 다른 남성을 만나고 있었다. 새로운 먹잇감이었다. 경찰은 존속 중상해와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 첫날 그녀는 “증거를 대라.”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변해 갔다. 2개월 전 유치장에서처럼 극도의 초조와 불안감에 떨었다. 결국 스스로 입을 뗐다. 4년간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경찰은 소변과 체모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다. 마약은 혈액으로 흡수돼 체내를 돌다가 소변으로 배출된다. 히로뽕은 1.5∼7일, 대마는 짧게는 1∼4일이면 밖으로 배출되지만, 상습 복용자는 최장 30일간 소변 시료에서 검출된다. 

이런 시간적 제약을 극복해 주는 것이 머리카락이나 체모 검사다. 모세혈관을 통해 모발에 흡수된 마약 성분은 계속 나이테처럼 층을 형성한다. 그래서 모발이 자라난 시기를 역으로 계산하면 투약 사실과 분량을 알 수 있다. 히로뽕 복용 여부를 확인할 땐 최소 50올 정도의 모발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겨드랑이털이나 음모를 채취하는 일도 많다. 같은 양의 마약을 복용했을 때 머리카락보다 음모나 겨드랑이털에서 농도가 높게 검출된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

왜 그럴까. 땀이 많은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털은 모공에서 정상적으로 올라온 마약성분 외에 주위의 땀까지 묻어 마약 성분에 이중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Y씨의 몸에서 마약 성분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그녀가 복용한 마약이 당시 마약류로 분류되지 않는 신종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대신 진술 녹화를 증거로 남겼다.

Y씨는 2000년 딸이 뇌진탕으로 사망하자 우울증에 걸려 마약에 빠졌다고 했다. 마약으로 슬픔은 이길 수 있었지만, 중독은 피할 수 없었다. 환각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얻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 Y씨는 2000년 5월 첫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오른쪽 눈을 핀으로 찔러 실명케 했다. 이듬해에는 잠자는 남편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부은 뒤 흉기로 배를 찔렀다. 첫 번째 살인 뒤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마약 살 돈을 구할 대상에 불과했다. 두 번째 남편도, 어머니도, 오빠도 예외는 없었다. 3명의 목숨과 5명의 눈이 그녀의 마약을 위해 희생됐다. Y씨는 2005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남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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