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패턴 수사로 푼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
현장에 남은 핏자국(혈흔)의 유형(패턴)을 분석한 과학수사로 대전 경찰이 7개월 만에 살인범을 붙잡았다는데….혈흔 패턴 수사 결과가 법원에서 유죄 증거로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유력한 용의자 범행 부인에
현장 혈흔 주목해 DNA 분석
핏방울 위치로 범행동선 그려
“피해자 둘이 싸웠을 가능성 0
범인은 옆집 남자입니다”
# 참혹한 아파트, 원점을 맴도는 수사
“여기 판암동 ○○아파트인데요, 사람이 죽었어요.”
지난해 4월4일 새벽 1시21분, 대전 119 상황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원룸형 아파트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벽과 천장, 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이불 위에 집주인 김아무개(58)씨와 이웃 ㄱ(53)씨가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심하게 맞아 얼굴 등이 으깨진 상태였다. 옆에는 굵은 전선을 자르는 절단기가 놓여 있었다. 김씨는 이미 숨진 뒤였고, ㄱ씨는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0여일 뒤 숨졌다.
신고자는 이아무개(51)씨. 그는 “김씨 등과 화투를 하는데 김씨와 ㄱ씨가 심하게 다퉈 이를 말렸다. 두 사람의 피가 묻어 김씨 집 조리대에서 손을 씻은 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김씨 집에 와보니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대전 동부경찰서는 숨진 김씨 등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사와 행적 등을 탐문했다. 아파트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 녹화영상을 분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김씨와 ㄱ씨는 4월3일 밤 10시부터 주검이 발견된 4일 새벽 1시21분 사이에 절단기로 각각 80여차례, 10여차례 맞은 것으로 추정했다. 범행 시간대에 김씨 집에 드나든 사람은 신고자 이씨뿐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씨는 “내가 집에 다녀온 사이 둘이 다시 싸우다 서로를 해친 것”이라며 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현장에 있던 3명 가운데 2명은 숨졌고 다른 1명은 이씨뿐이었지만, 경찰은 직접 증거나 범행 동기를 찾지 못했다. 수사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 혈흔을 분석하다
경찰은 다시 범행 현장을 주목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혈흔패턴 수사 전문요원인 과학수사계 허강진 경사를 투입했다. 허 경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남경찰청의 혈흔패턴 수사요원 등 3명으로 팀을 꾸린 뒤 현장을 다시 살피고 사진 수천장과 감식자료를 분석했다. 유전자(DNA) 분석으로 김씨와 ㄱ씨의 피를 가렸다.
허 경사팀은 4개월여 동안 어지럽던 현장의 핏방울 수천개가 왜 피해자들의 몸을 떠나 벽과 천장에 점과 선으로 남게 됐는지, 이불과 방바닥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분석했다.
김씨의 피는 방 안 왼쪽 벽 위에서 시작돼 점점 방바닥에 가깝게 내려와 뿌려졌고, 오른쪽 유리문에 묻은 피는 흉기에 묻었다가 휘두를 때 떨어져나간 흔적이었다. 김씨가 이불 위에 쓰러진 뒤에도 피의 흔적은 계속 나타났다. 범인이 왼쪽 벽 쪽에 서 있던 김씨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김씨가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을 때는 물론 이불에 쓰러진 뒤에도 타격을 가했다는 범행 동선이 완성됐다.
ㄱ씨는 방문에서 타격을 당한 뒤 의식을 잃고서 문에 기대앉은 자세에서 피를 흘리다 김씨 옆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됐다.
혈흔으로 범행 동선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과학 원리를 동원했다. 낙하해 둥글게 형성된 핏방울은 만유인력(중력)의 법칙, 맞아서 분출된 핏방울과 흉기에 묻었다 날아간 핏방울은 분출 압력과 포물선 공식, 관성의 법칙 등이 적용됐다. 피들의 증언은 끝났다.
# 진실 공방-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경찰은 범행 시각을 지난해 4월3일 밤 10시로 추정했다. 옆집 사는 ㅅ씨가 드라마를 보는데 ‘악’ 하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 진술에 따라, 드라마 방영 시간대와 장면을 확인했다. 폐회로텔레비전 영상에 이씨가 숨진 김씨 집에서 나온 시각은 밤 10시24분이었다.
숨진 김씨의 옷에서는 김씨, ㄱ씨의 옷에서는 ㄱ씨의 혈흔만 나타났다. 피해자들의 발바닥은 깨끗했다. 평소 김씨는 다리가 불편했고, ㄱ씨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다. 경찰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했다면 옷에 상대의 피가 튀었을 것이고 방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밟아 발바닥에 피 얼룩이 남았을 것이므로, 둘이 서로를 해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냈다.
반면 신고한 이씨의 옷에서는 김씨와 ㄱ씨의 혈흔이 모두 나왔고, 피해자의 피부조직 조각도 확인됐다. 이씨의 모자에도 피해자들의 피가 스며든 흔적과 위에서 떨어진 핏방울 등이 발견됐다. 피가 묻은 양말의 안쪽에서 채취한 각질은 이씨 것이었다. 그가 집에 갔을 때 신은 슬리퍼 안의 혈흔도 피해자들의 것이었다.
경찰은 이씨가 김씨와 ㄱ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김씨를 살해하고 ㄱ씨에게 상해를 입혔으며, 범행 과정에서 벗겨져 방바닥에 떨어진 모자에 피해자들의 피가 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씨가 범행 뒤 귀가해 옷을 빨고, 피 묻은 모자를 버린 뒤 다시 김씨 집으로 돌아와 신고한 것으로 결론냈다.
# 과학수사 결과 점차 위력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해 피고인 이○○을 징역 17년형에 처합니다.”
지난 1일 오후 대전지법 형사12부(재판장 안병욱)가 선고했다. 형사재판에서 처음으로 혈흔 형태 분석 결과가 증거로 인정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하고도 반성하지 않고 있고 유가족들과 합의하려 노력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범행이 우발적이고 동기도 드러나지 않은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무죄를 주장하며 국민참여 재판을 신청했으나 배심원 9명도 모두 유죄 평결했다. 이씨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 재판부를 바라봤다. 유가족들은 “저런 ××를 살려둬?” “이게 뭐야?”라며 격앙했다.
허강진 경사는 “과학수사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범인을 붙잡는 중요한 수사기법이다. 법원이 혈흔 패턴 분석 결과를 결정적인 증거로 인용해 보람을 느낀다”며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씨는 항소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물리법칙 활용 범행순간 재현
혈흔패턴 수사는
혈흔패턴수사는 물리학 법칙을 활용해 범행 지점과 피해자, 가해자의 움직임 등을 분석해 범행 당시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혈흔 수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경>에 있다. 창세기 ‘카인과 아벨’의 내용이다. 여호와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실을 부정하자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는데…’라고 말한다.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혈흔은 움직임이 없다. 피가 누구 것인가 밝히는 수준을 뛰어넘어 범행을 재현해내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혈흔 형태 분석은 검증된 과학 원리와 범죄수사가 결합된 최신 수사기법이다. 이 분석 결과가 법정 증거가 되려면 높은 전문성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방향·형태 다 다른 혈흔 추적
가해자와 피해자 움직임 그려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혈흔은 낙하 혈흔, 이탈 혈흔, 충격 혈흔, 형태 전이 혈흔, 고인 혈흔 등이다. 낙하 혈흔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둥글게 퍼지고 주변에 태양 흑점 같은 모습이 남는다. 이탈 혈흔은 범행 도구에 묻은 피가 도구의 움직임에 따라 벽 등에 뿌려진 것이다. 궤적이 여러 개 남아 있다면 그만큼 범행 도구를 휘둘렀다는 의미다. 혈흔 분석은 범행의 패턴을 짐작하는 증거가 된다.
이 수사 기법은 2002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표준화했다. 국내에서는 2008년 과학수사요원을 대상으로 교육이 시작됐다. 현재 혈흔패턴수사 전문요원은 각 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1명씩 배치돼 있다. 2010년 한국혈흔형태분석학회가 꾸려졌고 2011년에는 현장 실무자 중심의 연구모임(WGBPA)이 출범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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