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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놀이/과학수사

[한국판 CSI 어디까지 왔나] 죽은 자의 ‘소리 없는 증언’을 들어라





과학수사는 눈에 띄지 않는 자그마한 흔적, 시신의 손톱, 화장실 타일 틈새 등에서 사건의 단서를 찾고 수집하는 고단한 작업이다. 수없이 연습과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10팀 과학수사대원 2명이 지난 22일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현장실습장에서 지문 감식을 하고 있다. 컵 위에 형광가루를 바른 뒤 깃털로 털어내면서 플래시를 비추면 숨어 있던 지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김지훈 기자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지하 2층에는 전용면적 60㎡(18.18평)의 ‘가정집’이 있다. 옷장·화장대·책상이 갖춰진 안방, 소파·테이블이 놓인 거실, 4인 식탁이 들어선 주방까지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 없다.

이곳은 온갖 사건 현장으로 변신한다. 지난 7월 9일 문을 연 ‘과학수사 현장실습장’이다. 과학수사대원들은 매번 다른 형태의 모의사건을 구성한 뒤 직접 범행 현장을 꾸미고 감식과 분석을 한다. 수없이 연습하고 감식·분석을 반복한다.

과학수사팀은 보통 2인1조로 구성된다. 대형 사건에는 2∼3개 조가 투입돼 현장을 기록하고 단서를 수집한다. 역할은 철저하게 나뉜다. 사건 현장에 처음 발을 딛는 리더, 사진과 비디오 촬영 담당, 스케치 담당 등으로 일을 분담한다. 과학수사대원에게 팀워크는 ‘생명’이다.


손톱, 욕실 타일에서 찾는 ‘흔적’


사건 현장에서 지문과 함께 중요한 단서는 족적, 시신의 사망시간 등이 될 수 있다. 현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장갑, 발싸개 등으로 무장한 과학수사대원들이 22일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현장실습장에서 범행 현장 바닥에 젤라틴판을 붙여 발자국 크기와 모양을 채취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서울 강북·도봉·노원 지역을 맡는 서울경찰청 광역10팀 과학수사대원 김진수(46) 경위 등 5명이 지난 22일 오후 서울경찰청 지하 ‘가정집’에서 현장실습에 들어갔다. 현장 훼손을 막기 위해 전신을 덮는 하얀 클린가드를 입었다. 모자와 조끼, 발싸개, 장갑, 마스크도 필수다. 10팀은 지난 9월 과학수사평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서울경찰청장 표창을 받은 ‘베테랑’이다.

이날 10팀 앞에 벌어진 사건 현장은 이랬다. 46세 여성이 헤어드라이어 전선을 목에 감은 채 사망했다. 왼쪽 옆구리에 길이 3.5㎝, 폭 5㎜ 상흔이 있었다. 현장에선 핏방울이 묻은 칼도 발견됐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이 발견해 신고했고, 과학수사팀이 출동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가발을 쓴 마네킹이 방안에 누워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과일을 담은 접시와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찾아왔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이다.

현장 감식은 리더가 실내에 ‘플라스틱 통행판’을 놓는 것으로 시작됐다. 아크릴 재질로 된 통행판은 현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대원들이 접근할 수 있게 돕는다. 대원들이 통행판을 밟고 차례로 현장으로 진입했다. 이 모든 상황과 사건 현장 구석구석은 사진과 비디오 촬영, 스케치 작업으로 기록됐다.

대원들은 먼저 사체의 직장(直腸) 온도를 쟀다. 세 차례 측정해 얻은 평균값으로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한다. 이어 특수제작한 손전등 ‘블루 LED 라이트’와 ‘화이트 라이트’를 동원해 족적과 머리카락, 살점이나 체액 등 범행의 흔적을 샅샅이 뒤진다. 뭐든 발견되면 테이프를 이용해 모양과 크기를 살려 옮겼다. 젤라틴판으로 얻어낸 족적은 경찰청이 수집한 약 2만 켤레의 족적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게 된다.



과학수사대원들이 살해된 여성의 시신 모형에서 디지털 직장온도계로 직장 내 온도를 잰 뒤 기록하는 장면. 김지훈 기자



‘손’은 많은 진실을 쥐고 있다

사건 현장에서 손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피의자와 몸싸움을 했을 때 묻어 나온 DNA나 상처, 옷에서 떨어진 미세 섬유가 검출되는 일이 잦다. 미세테이프를 이용해 손바닥 흔적을 채취하고 슬라이드 글라스에 붙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낸다.

손톱도 잘라 밀봉한다. 손톱에도 수많은 단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허벅지 안쪽, 질과 항문, 귓불과 입술 등 접촉 가능성이 있는 부위도 면밀히 관찰했다. 이쯤 진행되니 대원들 이마에 땀이 맺혔다.

대원들은 피해자 목을 감고 있는 헤어드라이어 전선에 집중했다. 자살이라면 끈 자국은 목 부위에서 윗부분을 향해 남아 있게 된다. 타살일 경우엔 비교적 평행을 이룬다. 사후 10시간이 지나면 혈액이 중력에 따라 이동한 뒤 굳어 피부 표면이 붉은색을 띤다는 점도 고려할 변수다.

화장실 세면대의 S자형 배수관에 고인 물, 변기, 타일 틈새 등도 반드시 확인해야 할 대상이다. 김 경위는 “현장은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수사 과정 또한 변수가 많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능한 한 많은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난 8일 발생한 경기도 용인 ‘캣맘’ 사망사건에는 3차원 스캐너가 등장했다. 이 장비로 경찰은 각 지점의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해 거리·각도 등을 계산한 뒤 벽돌 투척지점을 예측해냈다. ‘트렁크 살인사건’ 용의자 김일곤(48)을 검거하는 과정에도 과학수사는 빛을 발했다. 현장 감식에 나선 과학수사팀은 피해자 가방에 있던 편지지 뒷면에 ‘닌히드린 용액’을 발라 지문을 추출해냈다. 이걸 바탕으로 처음 김일곤을 용의자로 특정했다.

과학수사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기법은 여전히 지문과 DNA 분석이다. 우리나라는 지문 분석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한다. 2004년 12월 쓰나미가 태국 등 동남아를 덮쳤을 때 현지에 파견된 우리 과학수사팀은 뜨거운 열기를 이용해 시신에서 지문을 찾아내는 ‘고온 습열 처리법’으로 현장을 놀라게 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는 범죄 분석 프로파일링, 지리적 프로파일링(용의자 거점 분석), 진술 분석이나 거짓말 탐지기, 몽타주와 법 최면 등으로 세분화해 분야별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CCTV에 찍힌 걸음걸이 특징을 비교·분석하는 법 보행 분석기법, 3차원 얼굴인식, 체취 증거, 정맥 패턴 등 정보기술(ICT)과 생명과학기술(BT)을 접목시키고 있다.

경찰청은 앞으로 5년간 180억원을 과학수사에 투자할 계획이다. 1948년 11월 4일 당시 내무부 치안국 감식과로 출발한 과학수사는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