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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놀이/과학수사

유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진실을 파헤친다




[가만한 당신] 클라이드 콜린스 스노우
DNA 감식 도입 훨씬 전 유골 분석 신원 확인 길 열고 

1970년대부터 선구적 활동

아르헨 학살 500구 발굴, 희생자 대변해 정의 향한 투쟁 



2006년 8월 이라크 바그다드 특별재판소. 전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전범혐의 재판 법정 증인석에 미국의 법인류학자 클라이드 스노우가 앉았다. 이날은 1988년 8월 크루드족 거주지인 할라브자 마을 주민을 화학무기로 학살한 혐의가 후세인에게 추가되면서 열린 첫 공판이었다. 스노우는 91년 중동지역 인권 매체인 ‘미들 이스트 워치(Middle East Watch)’의 요청으로 국제 법의학 전문가들을 이끌고 현장 발굴조사를 다녀온 터였다. 

재판장은 이날 이례적으로 후세인에게 전문가 증언에 대한 항변권을 부여했고,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하던 후세인은 ‘이라크 지역에는 집단 매장지가 널려 있다. 당신이 발굴한 곳이 수천 년 전 수메르인의 유적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따졌다. 스노우는 미국 남부 출신 특유의 느린 어조로, 그 특유의 냉소와 풍자와 사르캐즘(sarcasm)을 섞어 이렇게 대꾸한다. “수메르인들이 매~우 뛰어난 문명을 누렸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전자 손목시계를 찰 정도는 아니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계들은 1988년 3월 무렵에 대부분 멈춰 있었다.” 

스노우는 2009년 7월 가디언 위클리에 기고한 글에서 저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내 증언이 후세인의 최종평결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리고 이라크와 같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과거의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다.” 

DNA분석을 통한 유전자 감식 기법이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 전인 1970년대부터 유골 관찰과 분석 등 기법으로 피살자의 신원과 범죄 가능성 등을 확인하는 길을 개척했던 선구적 법인류학자 클라이드 콜린스 스노우(ClydeCollins Snow)가 지난 5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그는 이라크 학살 현장뿐 아니라 70~80년대의 아르헨티나와 칠레 엘살바도르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등 독재권력에 의해 자행된 제노사이드와 79년 시카고 항공참사, 95년 오클라호마 폭탄참사, 2001년 9.11 뉴욕 맨해튼 시신 발굴 현장에서 수많은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했고 또 법정에 서서 희생자를 대변하고 정의를 위해 싸웠다. 그는 이런 말들을 남겼다. 

-인간의 몸에는 206개의 뼈와 32개의 치아가 있다. 그 각각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뼈들의 이야기가 난해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뼈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며, 나쁜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다. 

-땅(유해가 묻힌)은 아름다운 여자와 같다. 만약 당신이 부드럽게 대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들려줄 것이다.

-증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망자, 특히 뼈는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의 증언은 조용하면서도 유창하다.

-뼈는 눈(雪)의 결정처럼 하나하나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들을 통해 유전적 특징과 영양 상태, 습관, 질병의 이력, 학대와 살인의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스노우는 1928년 1월 1일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태어나 서부텍사스 크로스비 카운티의 벽촌 랄스에서 자랐다. 반경 30 마일 이내 유일한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주민들의 출산에서부터 각종 사고 사건 현장에 뻔질나게 불려 다니곤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스노우는 아주 어려서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의 사연들에 익숙해졌다. 그가 인간의 유골을 처음 본 것은 12살 무렵이었다. 아버지와 사냥을 갔다가 사슴 뼈들과 함께 쌓인 인골을 보고, 희생자가 사냥감을 옮기다가 심장마비로 숨졌을 정황을 아버지와 함께 추리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가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였던 열쇠 꾸러미를 들고 실종된 인근지역 사냥꾼들의 집을 찾아 다닌 끝에 신원을 확인했다. 주검과의 그 강렬한 첫 만남을 스노우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소년시절 그는 수업보다는 호기심에 끌렸고 공부보다는 장난을 ‘과도하게’ 즐겼던 듯하다. 텍사스 주교육관이 학교를 방문하던 날 그는 친구들과 화약 장난을 쳐서 퇴학당하고, 로스웰의 뉴멕시코 군사학교에서 간신히 학업을 마친다. 졸업 후 댈러스의 남부감리신학대학, 베일러의 매디컬스쿨 등을 잠깐씩 다니지만, 역시 학위를 따는 데는 실패한다. 공부보다는 술을 더 즐긴 시절이었다. 그는 51년 동부 뉴멕시코대학을 근근이 졸업하고, 55년 텍사스공대에서 동물학으로 석사 학위를 딴다. 공군에 입대해 3년을 복무한 뒤 애리조나대학에 진학해 고고학을 전공, 유적 발굴기법 등을 익힌다. 67년 박사학위는 인류학으로 딴다. 저 모든 방황과 유전(流轉)이 스노우 자신이 짠 인생의 영리한 기획에 따른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후 50여 년에 걸쳐 그가 법인류학의 독보적 영역을 개척하는 동안 저 학습과 연구의 이력은 절묘하게 기여한다. 

그의 첫 직장은 미연방항공국(FAA) 사고ㆍ안전 연구원이었다. 크고 작은 항공기 사고의 유형과 승객 부상 등 피해 메커니즘을 조사해 좌석과 안전벨트 디자인을 개선하고 비상구위치와 긴급탈출 전략 등을 조정하는 등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기체보다는 승객, 즉 항공기 안전 역학보다는 승객의 상해 및 사망 사연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68년 FAA의 민간 항공의료위원회 법인류학 팀장이 됐고, 독보적인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78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의 하원 청문회에서 X레이의 진위를 확인하는 증인으로 그가 나섰고, 일리노이주의 성공한 건설업자로 70년대 무려 33명을 살해한 ‘광대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80년 사형)사건에서 피해자의 신원 확인 작업을 이끈 것도 그였다. 

79년 5월 시카고 오헤어공항을 이륙해 LA로 향하던 아메리칸 에어라인 191편이 기체 결함으로 일리노이주 상공에서 추락, 승객과 승무원 271명 등 273명이 숨진다. 당시로선 미국 초유의 참사였다. 스노우 팀은 희생자의 평상시 사진과 X레이, 관련자 증언 등을 토대로 1만2,000여 개에 달하는 유해 조각들을 분류, 234명의 신원을 확인해낸다. 영국의 유전학자 알렉 제프리가 인간의 유전자에서 33쌍의 염기서열을 발견, DNA로 명명된 유전자 지문을 확인한 것은 6년 뒤인 1985년이었고, DNA가 신원 확인의 법의학 자료로 활용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한국은 91년부터였다).

스노우는 자신의 역량을 보다 자유롭게 활용하고자 79년 FAA를 그만둔다. 83년 12월 출범한 아르헨티나의 라울 알폰신 정부는 76년 페론정부의 권력을 찬탈한 군부 쿠데타 세력들의 이른바 ‘더러운 7년 전쟁’의 희생자 발굴 작업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 85년 시작된 그 작업에는 불도저가 동원될 정도였다. 노동운동가와 정치인 등 군사정권에 의해 사실상 납치된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ㆍ행방불명자)’는 1만5,000~3만 명에 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무작위로 아무 곳이나 파헤쳐도 유골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올 정도였다”고 당시 발굴 상황을 기록했다. 스노우는 현지 학생 등으로 발굴단을 조직, 중국 음식점에서 얻어온 나무젓가락 등을 이용해 유골들을 분류, 약 500여 구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는 희생자 대부분이 당시 군대 무기인 이타카 숏건에 희생됐고, 고문 흔적으로 손가락 뼈가 부러진 사실 등을 법정에서 증언, 학살을 지휘한 고위 장성 5명의 유죄 평결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임신 중 납치돼 고문 끝에 숨진 한 여인의 골반뼈 이야기를 증언하기도 했다.(LA타임스, 2014.5.14)

험한 시절을 헤쳐 나온 국가와 국제인권단체들이 부를 때마다 그는 달려갔다. 유고, 필리핀, 엘살바도르, 칠레, 과테말라, 이라크, 콩고, 이디오피아 짐바브웨…. 그는 호주를 제외한 지구 전 대륙의 20세기 학살ㆍ참사 현장에서 일했다. 

그의 이름이 가장 뜨겁게 세계 언론에 등장한 것은 85년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멩겔레의 신원을 확인했을 때였다.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내과의사였던 멩겔레는 2차 대전 중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유대인 등 수용자의 생체실험을 주도해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1급 전범. 그는 나치 항복 직전 종적을 감춘 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나치 사냥꾼’ 비젠탈 그룹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살아남았다. 모사드가 1960년 홀로코스트의 지휘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면서 멩겔레의 흔적도 찾아냈지만 그를 붙잡는 데는 실패했다. 

포기를 모르는 조직으로 알려진 비젠탈 그룹은 79년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수영 도중 발작으로 익사한 ‘볼프강 게르하르드’라는 남자가 멩겔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브라질 정부에 협조를 구한 뒤 스노우에게 도움을 청한다. 스노우는 무덤을 열고 뼈들을 정교하게 조합한 뒤 키와 두개골 둘레 등 신체 사이즈와 나치 친위대 자료에 기록된 멩겔레의 유니폼 사이즈, 사진과 유골의 치아 등을 비교한 뒤 멩겔레의 유골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정한다. 확증을 얻기 위해 스노우는 독일인 법인류학 동료인 리처드 헬머와 함께 ‘두개골- 얼굴 중첩기법(skull-face superimposition)’으로 검증까지 거친다. 훗날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얼굴 복원에도 활용된 이 기법은, 귓구멍 안구 등 두개골의 해부학적 주요 지점 30곳과 얼굴 이미지를 정교하게 대조해 두개골에 입히는 기법. 그들은 멩겔레가 100% 확실하다는 의견을 낸다.(테크놀러지& 사이언스, 2014.5) 그 판정은 훗날 발견된 멩겔레의 치아 방사선 사진과 DNA분석으로 옳았음이 입증된다. 멩겔레의 해골: 법심미학의 도래라는 책의 저자 이얼 바이저만은 “멩겔레 조사는 실종자의 신원 확인 기법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권범죄 사건에서 과학자가 전문가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크다”고 썼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DNA분석 등 다양한 과학수사 기법들이 활용되고 있는 지금도 미국 내 약 100여명의 법인류학자가 활약 중이다. 

2009년 가디언 위클리 기고문에서 스노우는 90년대 초 볼리비아에서 전설의 악당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유해 발굴 실패담도 소개했다. 미국 공영방송 PBS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그 발굴 작업에서 스노우는 부치와 선댄스가 남미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끝에 볼리비아의 고원지대 마을인 산 비센테라는 곳에서 사살됐다는 기록과 1911년 두 명의 ‘그링고(미국인)’가 묻혔다는 당시 경찰 조사를 근거로 작은 묘지에서 두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하지만 DNA 분석 결과 시신은 당시 현지 탄광 기술자로 파견됐다 총기 사고로 사망한 독일인의 유해로 판명된다. 스노우는 “내게 그 일은 대단한 과학적 경험이었다. 틀릴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몇 피트 정도 떨어진 무덤을 열었다면 부치와 선댄스를 찾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둘이 죽어서까지 추적을 피했다는 점에서 더 멋진 결말이었던 듯도 하다”고 썼다. 

오클라호마 노먼의 스노우 집을 방문했던 이코노미스트 기자는 작업실과 거실의 구분조차 없던 집 분위기를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두개골과 골편들이 널려 있는 테이블 위에서 커피를 마시고, 필터 없는 카멜 담배를 끊임없이 피워대며 유쾌한 담소를 나눴다는 이야기. 그는 가끔 테이블 위의 두개골들을 애틋한 손길로 어루만지곤 했다고 한다. 

과테말라 조사 당시 현지 경찰이 트집을 잡으며 출입을 막자 그는 근엄한 자세로 주머니에서 일리노이주 검시관협회의 커다란 금속 배지를 내보인 뒤 당당하게 통과했다고 한다. 코미디의 한 장면 같은 그 일화의 사연을 묻는 워싱턴포스터 기자에게 그는 “(권력과 마찰을 빚을 땐) 언제나 더 큰 배지를 가진 놈이 이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참혹한 발굴 현장에서 학생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할 때면 “가운을 입고 작업모를 썼을 때는 냉정하게 작업에 임하라. 울어야겠다면 밤에 집에 가서 울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UC버클리 법대 교수인 에릭 스토브는 저 말을“‘먼저 과학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인간성을 잃지는 마라’는 말로 들었다”고 기억했다. 

스노우는 세 차례 결혼과 이혼을 했고, 70년 결혼한 제리 휘슬러와 해로했다. 휘슬러는 스노우가 집에서는 쥐조차 못 잡게 했다고 전했다. 휘슬러는 “작업 속에 너무 많은 죽음과 파괴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