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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놀이/법의학

신원확인



시체 검사에서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은 (1) 주검의 신원확인(누가), (2) 사망시각(언제) 추정, (3) 사망장소(어디서) 확인, (4) 사망원인(왜) 결정, (5) 사망의 종류(어떻게) 결정, 그리고 (6) 증거물 확보 등이다. 신원확인이 법의학 영역에서 문제되는 일은 많지 않다. 대개 신원을 알고 있거나, 식구나 친지가 확인하거나 또는 경찰청이 갖고 있는 지문 자료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지가 확인하지 못하거나 지문을 채취할 수 없는 정도로 훼손되었을 경우에 주검을 확인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워진다. 그런 예를 들어본다.

비행기가 사고 나면 주검이 많이 훼손된다. 심지어 주검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때는 어느 개인의 사망을 확인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물론 비행기 탑승자 명단을 보면 사망자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도 있지만, 그 누구라도 주검 또는 주검의 일부라도 보지 않고는 사망을 진단하거나 선고할 수는 없고, 그러면 법은 어느 사람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법은 이런 경우에 일단 '실종 신고'를 하도록 하고, 끝까지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사망신고를 받는다. 만약 영화나 추리소설에서 보듯 다른 사람 이름으로 탑승하였다면 어떡하나?

이와 같이 대형사고가 생기면 외국에서는 법의학전문가, 법치의학전문가, 법인류학자 등이 동원된 팀이 구성되어 흩어진 주검 또는 주검의 일부가 누구인지를 찾아낸다. 이때 피해자의 치료 경력과 기록, 치과 기록, 신체 특성과 같은 자료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1993년 1월의 신문을 보면 '지난해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고 사망자 가운데 가족들이 고아무개 씨로 확인해 이미 화장한 시신은 고씨가 아니라 그동안 실종자로 처리됐던 이아무개 군으로 밝혀졌다'는 기사가 있다.

이런 일은 바로 대형사고에서 사망자 처리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그만 조직이라도 있으면 유전자 감식이라는 방법으로 백만 분의 일이나 천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웬일인지 모르겠다. 1993년에 일어난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과 서해 페리호 침몰 사건 이후에 신원확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그 이후에 발생한 대형참사(2003년에는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에서는 신원확인에 DNA 감식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출처> 법의학의 세계. 이윤성.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