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패턴 수사로 푼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

현장에 남은 핏자국(혈흔)의 유형(패턴)을 분석한 과학수사로 대전 경찰이 7개월 만에 살인범을 붙잡았다는데….혈흔 패턴 수사 결과가 법원에서 유죄 증거로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유력한 용의자 범행 부인에

현장 혈흔 주목해 DNA 분석

핏방울 위치로 범행동선 그려

“피해자 둘이 싸웠을 가능성 0

범인은 옆집 남자입니다”


# 참혹한 아파트, 원점을 맴도는 수사

“여기 판암동 ○○아파트인데요, 사람이 죽었어요.”

지난해 4월4일 새벽 1시21분, 대전 119 상황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원룸형 아파트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벽과 천장, 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이불 위에 집주인 김아무개(58)씨와 이웃 ㄱ(53)씨가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심하게 맞아 얼굴 등이 으깨진 상태였다. 옆에는 굵은 전선을 자르는 절단기가 놓여 있었다. 김씨는 이미 숨진 뒤였고, ㄱ씨는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0여일 뒤 숨졌다.

신고자는 이아무개(51)씨. 그는 “김씨 등과 화투를 하는데 김씨와 ㄱ씨가 심하게 다퉈 이를 말렸다. 두 사람의 피가 묻어 김씨 집 조리대에서 손을 씻은 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김씨 집에 와보니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대전 동부경찰서는 숨진 김씨 등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사와 행적 등을 탐문했다. 아파트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 녹화영상을 분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김씨와 ㄱ씨는 4월3일 밤 10시부터 주검이 발견된 4일 새벽 1시21분 사이에 절단기로 각각 80여차례, 10여차례 맞은 것으로 추정했다. 범행 시간대에 김씨 집에 드나든 사람은 신고자 이씨뿐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씨는 “내가 집에 다녀온 사이 둘이 다시 싸우다 서로를 해친 것”이라며 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현장에 있던 3명 가운데 2명은 숨졌고 다른 1명은 이씨뿐이었지만, 경찰은 직접 증거나 범행 동기를 찾지 못했다. 수사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 혈흔을 분석하다

경찰은 다시 범행 현장을 주목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혈흔패턴 수사 전문요원인 과학수사계 허강진 경사를 투입했다. 허 경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남경찰청의 혈흔패턴 수사요원 등 3명으로 팀을 꾸린 뒤 현장을 다시 살피고 사진 수천장과 감식자료를 분석했다. 유전자(DNA) 분석으로 김씨와 ㄱ씨의 피를 가렸다.

허 경사팀은 4개월여 동안 어지럽던 현장의 핏방울 수천개가 왜 피해자들의 몸을 떠나 벽과 천장에 점과 선으로 남게 됐는지, 이불과 방바닥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분석했다.

김씨의 피는 방 안 왼쪽 벽 위에서 시작돼 점점 방바닥에 가깝게 내려와 뿌려졌고, 오른쪽 유리문에 묻은 피는 흉기에 묻었다가 휘두를 때 떨어져나간 흔적이었다. 김씨가 이불 위에 쓰러진 뒤에도 피의 흔적은 계속 나타났다. 범인이 왼쪽 벽 쪽에 서 있던 김씨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김씨가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을 때는 물론 이불에 쓰러진 뒤에도 타격을 가했다는 범행 동선이 완성됐다.

ㄱ씨는 방문에서 타격을 당한 뒤 의식을 잃고서 문에 기대앉은 자세에서 피를 흘리다 김씨 옆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됐다.

혈흔으로 범행 동선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과학 원리를 동원했다. 낙하해 둥글게 형성된 핏방울은 만유인력(중력)의 법칙, 맞아서 분출된 핏방울과 흉기에 묻었다 날아간 핏방울은 분출 압력과 포물선 공식, 관성의 법칙 등이 적용됐다. 피들의 증언은 끝났다.

# 진실 공방-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경찰은 범행 시각을 지난해 4월3일 밤 10시로 추정했다. 옆집 사는 ㅅ씨가 드라마를 보는데 ‘악’ 하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 진술에 따라, 드라마 방영 시간대와 장면을 확인했다. 폐회로텔레비전 영상에 이씨가 숨진 김씨 집에서 나온 시각은 밤 10시24분이었다.

숨진 김씨의 옷에서는 김씨, ㄱ씨의 옷에서는 ㄱ씨의 혈흔만 나타났다. 피해자들의 발바닥은 깨끗했다. 평소 김씨는 다리가 불편했고, ㄱ씨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다. 경찰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했다면 옷에 상대의 피가 튀었을 것이고 방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밟아 발바닥에 피 얼룩이 남았을 것이므로, 둘이 서로를 해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냈다.

반면 신고한 이씨의 옷에서는 김씨와 ㄱ씨의 혈흔이 모두 나왔고, 피해자의 피부조직 조각도 확인됐다. 이씨의 모자에도 피해자들의 피가 스며든 흔적과 위에서 떨어진 핏방울 등이 발견됐다. 피가 묻은 양말의 안쪽에서 채취한 각질은 이씨 것이었다. 그가 집에 갔을 때 신은 슬리퍼 안의 혈흔도 피해자들의 것이었다.

경찰은 이씨가 김씨와 ㄱ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김씨를 살해하고 ㄱ씨에게 상해를 입혔으며, 범행 과정에서 벗겨져 방바닥에 떨어진 모자에 피해자들의 피가 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씨가 범행 뒤 귀가해 옷을 빨고, 피 묻은 모자를 버린 뒤 다시 김씨 집으로 돌아와 신고한 것으로 결론냈다.

# 과학수사 결과 점차 위력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해 피고인 이○○을 징역 17년형에 처합니다.”

지난 1일 오후 대전지법 형사12부(재판장 안병욱)가 선고했다. 형사재판에서 처음으로 혈흔 형태 분석 결과가 증거로 인정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하고도 반성하지 않고 있고 유가족들과 합의하려 노력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범행이 우발적이고 동기도 드러나지 않은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무죄를 주장하며 국민참여 재판을 신청했으나 배심원 9명도 모두 유죄 평결했다. 이씨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 재판부를 바라봤다. 유가족들은 “저런 ××를 살려둬?” “이게 뭐야?”라며 격앙했다.

허강진 경사는 “과학수사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범인을 붙잡는 중요한 수사기법이다. 법원이 혈흔 패턴 분석 결과를 결정적인 증거로 인용해 보람을 느낀다”며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씨는 항소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물리법칙 활용 범행순간 재현

혈흔패턴 수사는


혈흔패턴수사는 물리학 법칙을 활용해 범행 지점과 피해자, 가해자의 움직임 등을 분석해 범행 당시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혈흔 수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경>에 있다. 창세기 ‘카인과 아벨’의 내용이다. 여호와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실을 부정하자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는데…’라고 말한다.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혈흔은 움직임이 없다. 피가 누구 것인가 밝히는 수준을 뛰어넘어 범행을 재현해내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혈흔 형태 분석은 검증된 과학 원리와 범죄수사가 결합된 최신 수사기법이다. 이 분석 결과가 법정 증거가 되려면 높은 전문성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방향·형태 다 다른 혈흔 추적

가해자와 피해자 움직임 그려


대전 판암동 살인사건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혈흔은 낙하 혈흔, 이탈 혈흔, 충격 혈흔, 형태 전이 혈흔, 고인 혈흔 등이다. 낙하 혈흔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둥글게 퍼지고 주변에 태양 흑점 같은 모습이 남는다. 이탈 혈흔은 범행 도구에 묻은 피가 도구의 움직임에 따라 벽 등에 뿌려진 것이다. 궤적이 여러 개 남아 있다면 그만큼 범행 도구를 휘둘렀다는 의미다. 혈흔 분석은 범행의 패턴을 짐작하는 증거가 된다.

이 수사 기법은 2002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표준화했다. 국내에서는 2008년 과학수사요원을 대상으로 교육이 시작됐다. 현재 혈흔패턴수사 전문요원은 각 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1명씩 배치돼 있다. 2010년 한국혈흔형태분석학회가 꾸려졌고 2011년에는 현장 실무자 중심의 연구모임(WGBPA)이 출범했다. 


송인걸 기자 






“김 사장, 우리 집사람이 전화를 통 안 받네. 미안하지만 2층 좀 올라가봐 줘.” 2005년 6월 8일 오전 10시쯤 부산의 한 중국 음식점. 가게 문을 열자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위층 남자였다. 멀리 출장 나와 있는데 집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중국집은 얼마 전까지 위층에서 운영했던 터라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일종의 ‘개구멍’이 나 있었다. “아주머니. 저 아래층입니다.” 중국집 김씨는 빠끔히 머리를 내밀어 2층 내부를 들여다봤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밀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김씨는 기절초풍을 했다. 1층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전화를 찾았다. “여기 ○○반점 2층인데요. 사, 사람이 죽어 있어요.”

●LCV가 찾아낸 피 묻은 신발 자국

감식반이 확인한 시신은 2층 안주인 A(당시 63세)씨였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범인은 A씨의 머리와 옆구리 등을 흉기로 24차례나 찔렀다. 목을 조른 흔적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뒤엔 그 모습이 참혹했는지 시신 위에 옷가지를 수북이 덮어 두었다. 집 안이 어두운 건 두꺼비집(분전함)이 내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문을 연 흔적도 없었고, 패물 등 사라진 것도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에 무게를 뒀다. 집 안 곳곳에 뿌려진 혈흔들을 볼 때 사망자는 숨이 다하기 전 범인과 꽤 오랫동안 몸싸움을 한 듯했다. 그러나 지문 등 범인의 흔적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여기 발자국이 있는데요.”

감식반원이 가리킨 곳에 별 모양의 신발 자국이 보였다. 235~240㎜가량의 운동화 아니면 등산화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여자인가? 아니면 발이 매우 작은 남자인가?

살인 현장에서 혈흔 족적이 발견되면 감식반은 LCV(Leuco Crystal Violet)나 루미놀(Luminol) 등 특수 시약을 쓴다. 범인의 발 크기와 신발 종류 등을 분명하게 알아내려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화학적인 흔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LCV는 혈흔 속의 단백질에 반응한다. 보통 때는 무색의 액체지만 혈흔과 만나면 자주색으로 변한다. 비교적 시약을 만들기가 쉽고 밝은 곳에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루미놀이나 플루오레세인 등도 이용된다. 피가 있는 자리에 발광 현상을 일으키는 루미놀은 시약을 만들기가 쉽지만 반응이 일시적이고, 주위가 어두워야 하는 단점이 있다. 플루오레세인은 반응의 결과물이 매우 밝고 오래 가지만, 자외선 같은 가변광원을 이용해야 하는 데다 만들기도 비교적 까다롭다.

경찰은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용의선상에 올렸다. A씨의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벽부터 여러 차례 집에 전화를 해 대고, 마치 독촉이라도 하듯 현장에 1층 주인을 가 보라고 한 게 오히려 더 의심을 샀다. 출장이라고 간 곳도 자동차로 고작 100여분 거리. 마음먹기에 따라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하는 데 충분했다.

두 번째 용의자는 A씨에게 5000만원을 빚지고 도망간 B(당시 45세)씨. 한때 둘도 없이 친했지만 돈이 걸리면 언제든 독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어서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마지막 용의자는 피해자에게 5000만원을 빌려 준 남편의 친구 C(당시 66세)씨. C씨는 A씨의 시신이 발견되기 3시간 전인 아침 7시쯤 현관까지 왔다가 안에서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역시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했다. 2년 전 아내가 집을 나간 C씨는 본인은 그날 저녁 혼자 잠을 잤다고 했다.

●60대 살인자가 사용한 교묘한 술책

이상한 것은 용의선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235~240㎜의 신발에 맞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가 날아왔다. 죽은 A씨의 손톱 밑 혈흔이 C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범인의 흔적을 담아낸 셈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할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담당 형사와 C씨 간에 피 말리는 심리전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10여 시간. 굳게 닫혀 있는 60대 범죄자의 입이 결국 열렸다.

“제가 죽였습니다.”

C씨가 진술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남편이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인지 A씨와 C씨는 자주 왕래를 하다가 각별한 사이가 됐다. 그렇게 4년. 관계가 깊어지면서 A씨는 필요할 때마다 C씨에게 돈을 융통해 썼다. 그러다 둘 사이에 결정적인 갈등이 생겼다.


“제가 사정이 급해져서 꿔준 돈을 돌려받으려 하자 A가 냉정하게 돌아서더군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매몰차게 거절하는데 정말…, 그런 배신감과 분노가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결국 그는 등산용 장갑을 끼고 칼을 챙겼다. 폐쇄회로(CC) TV에 찍힐 수 있다는 생각에 커다란 등산용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평소 자기 차에 보관해 두고 있던 A씨의 등산화를 신었다. 현장에 족적이 남을 것을 예상한 술책이었다. 그는 한때 사랑했던 여성에게 스무 번 넘게 분노의 비수를 꽂았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을 즈음 담당 형사의 새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2년 반 전 집을 나갔다는 C씨의 아내(실종 당시 58세)에 대한 수사였다. A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는 C씨 부인이 단순하게 실종된 게 아니라고 직감했다. 말을 할 때마다 C씨의 이야기는 엇갈렸고, 손과 눈빛이 떨렸다.

“부인은 어디에 있나요.”

“…”

얼마의 침묵이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집요.”

“만기가 다가오던데, 보험금 타려고 그간 숨어 지낸 건가요.”

“아니요. 몸은 마루에 있고, 머리는 안방 침대 밑 바닥에 있어요.”

그는 2002년 10월 28일 자신의 목공소에서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다음 날 집 한켠에 묻었다. 여자가 남편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는 게 살해 동기였다. 이듬해 초 집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는 아내의 시신을 꺼내 머리와 몸통을 분리한 뒤 안방과 현관 마루 쪽에 각각 묻었다. 처음 묻으려던 현관이 비좁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매일 잠을 자던 곳은 아내의 머리가 묻힌 쪽이었다.


whoami@seoul.co.kr






‘완전범죄와의 전쟁’은 진화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에만 의지해 사건의 진실을 밝혔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첨단과학이란 도구를 이용해 범죄의 흔적을 찾는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수사관들이 범죄 현장에서 발견한 발자국을 정밀조사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한국판 CSI, 과학수사의 모든 것

《 “Crime Does Not Pay(범죄는 득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청와대에서 법무부와 안전행정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영어 문구를 인용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안전한 나라 행복한 국민’을 강조하며 치안 강화를 강조했다.

경찰은 최근 주민등록시스템에 저장된 지문 4억여 개의 해상도와 선명도를 높이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기초로 살인 강도 강간 등 중요 미제 사건에 대해 지문을 다시 검색했고 미제 사건들을 하나씩 해결해가고 있다. 2000년 10월 발생했던 서울 구로구 커피숍 여주인 살인사건의 범인 고모 씨(41)를 공소시효 2년이 남은 지난해 5월 검거한 것도 과학수사로 이룬 개가였다.

경찰은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라는 명제를 믿는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완전범죄를 꿈꾸며 범행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지만 대한민국 경찰 과학수사팀은 첨단 장비를 사용해 아주 작은 단서까지 찾아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찰은 범죄 피해자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해 지능범들과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고 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Korea Crime Scene Investigation), ‘한국판 CSI’의 현장을 들여다봤다. 》  

▼ 온 힘 다해 움켜쥔 손바닥, 그 안에 사건 풀 열쇠가… ▼

속옷 벗겨졌지만 정액 검출안돼… 주인없는 담배꽁초에 혼선 가중

시신 손에서 나온 티셔츠 섬유… 우연히 묻은걸로 보기엔 많은 양

‘반쪽 증거’ 수사에 반전이…


이문철(가명·33) 씨가 눈을 감았다. 

“사건 발생 당일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경찰의 의심이 이 씨를 향했다. 이 씨는 표정 없는 답을 내놨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어요.” 

징검다리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해 9월 22일 오후 11시경. 그날 이 씨의 아내가 죽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주상복합아파트 ○○○호.

잔뜩 부은 아내의 얼굴에는 처참함만 남았다. 팬티는 발목에 가까스로 걸려 있었다. 브래지어는 벗겨진 채였다. 세 딸에게 물리던 젖가슴에 시퍼런 멍이 몇 다발씩 피어 있었다. 아내의 부드러웠던 살결은 부러진 갈비뼈로 구겨졌다. 사이사이 죽음의 그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패가 진행된 아내의 몸속에는 가스가 찼고 높아진 압력 탓에 입가와 코밑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아내의 눈동자는 고집스럽게 벽 쪽을 향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그녀의 마지막 시선이 닿은 곳엔 한 살, 세 살, 다섯 살 된 딸들의 돌 사진과 결혼기념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결혼 6년차. 남편을 만나고 세 딸을 낳기까지 보낸 많은 시간이 사진에 담겨 있었지만 아내의 죽음은 한 줄로 요약됐다.

‘목졸림에 의한 질식사. 심한 폭행으로 인한 다발성 늑골 골절 및 간 췌장 등 장기 파열, 강도 및 성폭행 시도, 심한 폭행.’ 

평온했던 밤, 아내가 죽었다

아내가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건 23일 오후 1시 반. “이 사람아, 서둘러 집으로 가보게.” 일산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내가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는 장모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집으로 달려왔다. 전날 밤 첫째 딸 유영이(가명)를 데리고 본가에 가 있던 참이었다. 30분 거리의 집으로 급히 차를 몰며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둘째 아영이(가명·3)와 셋째 수영이(가명·1)가 오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이 도착했다. 한낮이었지만 주검이 놓인 방 안은 서늘했다. 한기(寒氣)의 의미를 생각할 틈도 없이 두 딸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이의 얼굴에 남은 눈물자국이 아내의 부재(不在)를 예감케 했다. 현관에서부터 거실이 한눈에 들어오기까지는 불과 다섯 걸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안은 현실로 바뀌었다.


거실에는 벌거벗겨진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 “여보….” 딱딱하게 굳은 아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품에 안은 두 딸의 체온이 집 안 유일한 온기(溫氣)라는 생각이 들자 남편 목덜미에 소름이 스쳤다.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관에 ‘출입금지 POLICE LINE 수사 중’이란 노란 테이프를 붙이고 나서야 이 씨는 아내의 죽음을 실감했고, 오열했다.

아내의 다리 쪽에서 담배꽁초가 나왔다. 양 젖가슴에는 침이 묻어 있었다. 음모와 머리카락이 시신의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아내의 몸에서 흘러내린 오줌이 이불에 흥건했다. 장롱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고 컴퓨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주방에서 또 다른 담배꽁초가 발견됐다. 낯선 남자의 주민등록증도 나왔다. 남편 이 씨는 “아내에게 빚을…, 빚을 진 남자가 잠시 맡겨둔 신분증”이라고 했다. 남편은 온전히 한 문장을 잇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아내의 몸에 온도계가 꽂아졌다. 직장온도 33.4도, 12시간 전 사망했다는 뜻이었다. 남편이 첫째 유영이를 데리고 집을 나선 즈음이다.

‘반쪽짜리 흔적’만 곳곳에 남았다

사건 현장에 남은 흔적은 범인의 목적을 드러내 보이기 마련이다. 단순절도, 강도, 강간, 원한에 의한 살인 등 범인이 남긴 흔적은 범행의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반쪽짜리 흔적이 너무 많다.” 현장을 살핀 고양경찰서 과학수사팀장이 말했다. 집 안 곳곳에 남은 수많은 흔적은 목적이 빠진 ‘반쪽짜리’였다. 속옷이 벗겨진 아내의 몸에 정액은 없었다. 방 안을 뒤진 흔적은 있지만 귀중품은 그대로였다. 화장대와 이불 밑처럼 꼭 뒤져야 할 곳에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이상했다. 

주민등록증의 주인은 범행 추정 시간 당시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담배꽁초의 주인도 아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제3자의 지문이나 족적(足跡)도 없었다. 수거된 음모는 모두 남편과 아내의 것이었다. 목적이 보이지 않는 반쪽짜리 흔적은 수사를 안갯속으로 내몰았다.

아내의 젖가슴에서 발견된 타액의 주인은 둘째 아영이와 막내 수영이었다. 유일하지만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격자. “너희가 배가 고파서 엄마 브래지어를 벗겨 젖도 빨고 그런 거니? 너희가 속옷을 벗겼어?” 목격자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2개의 담배꽁초에서 검출된 유전자형과 일치하는 남성 없음.’ 

담배꽁초에 걸었던 기대가 사라졌다. 당일 집에 택배를 배달했던 배달원, 아내에게 빚을 지고 주민등록증을 맡긴 남성,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웃, 그리고 남편까지 담배꽁초 유전자(DNA) 분석 결과와 일치하는 용의자가 없었다. 주인 없는 담배꽁초는 단서가 되지 못했다. 아내의 통화 기록도, 용의자들의 스마트폰 인터넷 검색기록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보험에도 들지 않았다. 경찰 수사는 원점에서 맴돌았다.

경찰은 범행시간 전후로 엘리베이터 폐쇄회로(CC)TV를 확인했다. 그곳에도 용의자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전날 밤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선 남편과 딸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화면 속 남편 이 씨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 현관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첫째 유영이가 아빠와 눈을 맞췄다. ‘엄마한테 인사해야지’라는 의미를 읽은 유영이도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9월 22일 오후 11시 58분. 폐쇄회로 화면의 디지털 숫자 위로 겹쳐진 유영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현관 앞 모습이 화면에 잡히지 않았지만 유영이의 웃음은 남편과 아이를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을 짐작하게 했다.

보이지 않았던 결정적 증거

‘변사자의 손바닥에서 채취한 테이프에서 남편이 당일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 구성 섬유와 같은 보라색 계열 섬유물 발견. 동일한 두께 꼬임 및 성분 유사한 섬유가 식별됨.’

사건 발생 8일 뒤인 10월 1일. 아내의 손과 목에서 채취한 미세증거물 분석 결과가 고양경찰서에 도착했다. 사망 직전 아내가 마지막으로 만진 물건이 남편의 반팔 티셔츠라는 뜻이다. 부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손에 남은 섬유의 양이 너무 많았다. 무엇인가 온 힘을 다해 쥐었을 때라야 남는 양이었다.

“그날 우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애들과 같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아이들을 안방에 먼저 재웠어요. 함께 TV를 보다가 아내가 잔다고 해서 큰 애만 깨워서 나왔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내와 다투지는 않았습니까?”

“작은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곧바로 화해했어요. 당일 아내의 휴대전화로 보낸 ‘앞으로 더 잘 지내자’는 문자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어떤 프로를 보셨죠?” 

“개그콘서트를 봤습니다.” 

범인 추적과 사건 해결의 핵심인 경찰의 과학수사 기법은 최첨단을 달린다. [1] 사건 현장에 남은 핏방울만으로 범행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 [2] 지문을 찾아 용의자를 추적한다. [3] 현장에 남은 발자국도 용의자가 신고 있는 신발의 종류, 신체조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제공


“당일 보신 개그콘서트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

남편은 대답하지 못했다. 경찰은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명했던 CCTV에 아내의 모습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남편이 손을 흔들었던 곳, 아이가 아빠를 따라 손을 흔들었던 방향. 그곳에는 남편과 아이를 배웅하는 엄마의 미소가 아닌, 눈조차 감지 못한 아내의 시신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경찰이 짐작한 ‘아내의 배웅’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뒤따라 발견된 또 하나의 CCTV 화면. 아내의 시신이 발견된 당일 경찰은 현장 훼손을 막기 위해 오열하는 남편을 두 아이와 함께 집 밖으로 내보냈다. 아내의 옆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던 남편은 엘리베이터에 타자 금세 태연해졌다. 언제 눈물을 흘렸느냐는 듯 무심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머리를 만지고 이를 내보이며 치아 상태를 확인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음 날 오후 경기지방경찰청 제2청사 조사실. 남편이 거짓말탐지기 앞에 앉았다. “당신이 부인을 죽였습니까?” 남편의 호흡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연한 척 애써 가다듬은 호흡이 떨렸다. “아내를 때려서 죽게 한 게 당신입니까?” 그가 경찰의 시선을 외면했다. 거짓말탐지기의 기록계 파장이 이 씨의 맥박과 호흡을 따라 요동쳤다. “담배꽁초는 아내를 죽이기로 계획하고 미리 준비한 것이죠?” 경찰의 마지막 질문에 남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항상 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길 3년째. 남편은 완전범죄를 계획했다. 아내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길가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척한 것도, 첫째 유영이를 데리고 집을 나선 것도 모두 경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셋째를 엄마의 시신과 함께 두고 잠에서 깬 아이들이 현장을 훼손시켜 주길 바랐다. 자식들이 직접 죽은 엄마의 시신을 더럽히길 기대했다.

경찰은 “남편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마다 꼭 범인을 잡아 달라고 울며 부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범행을 실토한 날, 남편은 울지 않았다.  

▼ 혈흔은 알고 있다… 범인 체형-자세, 도망친 속도까지 ▼

현장 주변 말라붙은 침자국에서 DNA 채취해 절도범 검거

땀방울 DNA분석해 용의자 잡고… 대변 속 장점막 세포가 단서되기도

흐릿한 CCTV 얼굴식별 잘안돼… 특유 걸음걸이 분석 기법 개발


모든 사건이 경찰의 바람처럼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사건이 ‘장기 미제’로 남아 있다. 그중 1986년부터 5년간 10명의 부녀자가 성폭행당한 후 살해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찰에 깊은 흉터로 남아 있다. 

역대 최대 경찰력이 동원된 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사건 수사에만 연인원 200만 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했다. 조사한 용의자와 참고인이 2만1280명에 이르고 지문 대조만 4만116명을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알아낸 단서는 ‘20대 중반의 B형 남성. 165∼170cm 호리호리한 몸매’가 전부였다.

30년 가까이 지났어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고서야 경찰은 비로소 ‘과학수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에 낡은 점퍼를 걸치고 동물적 직감이 최고의 수사방법이란 착각에 빠진 경찰의 모습은 사라졌다. 범죄 현장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밤낮으로 피해자 주변을 배회하며 단서가 ‘걸리길’ 바라는 형사는 이제 없다.

2014년 한국의 과학수사는 어떤 모습일까. 동아일보는 경찰청 과학수사센터(KCSI)와 함께 전국 특별시·광역시도 16개 지방경찰청에서 최근 2년 동안 강력사건 해결에 과학수사 기법이 활용된 사례를 종합했다. 사건 현장이나 피해자 신체에 남은 작은 증거를 찾아 분석하는 미세증거 분석, 핏방울의 모양을 관찰해 범행을 재구성하는 혈흔형태 분석, 손바닥에 난 손금 무늬 모양으로 범인을 식별하는 장문(掌紋) 분석, 폐쇄회로(CC)TV에 촬영된 용의자의 걸음걸이 특징을 비교·분석하는 걸음걸이 분석…. 경찰의 과학수사 기법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졌고 범인 추적과 사건 해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한 방울의 피에 담긴 의미

혈흔은 범행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큰 단서다. 강력사건 현장에서 발견되는 혈흔은 유전자(DNA) 분석에만 쓰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피의 다양한 성질은 과학수사의 중요한 단서로 활용된다.

혈액은 점도가 1인 물에 비해 4배 정도 점착성이 높아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혈관 밖으로 나온 피는 젤리처럼 굳어진다. 굳어지기 전 혈액은 가해진 힘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바뀌며 분산된다. 혈흔은 재현 가능한 흔적이며, 경찰은 혈흔의 분포상태 모양 특징 크기 등의 정보를 통해 사건 당시 상황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위에서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자유낙하 혈흔의 지름을 통해 피해자나 가해자의 자세를 유추할 수 있다. 또 범행도구의 움직임에 따라 벽 등에 뿌려진 이탈혈흔의 궤적은 범행 도구를 휘두른 횟수와 방향을 증명한다. 움직이면서 흘린 피는 움직인 방향으로 폭이 줄어들며 긴 모서리를 남기는데 이에 따라 범인이나 피해자의 이동 방향과 속도를 알아낼 수 있다.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거짓을 말하지도 않는다. 몸에 남은 다양한 흔적들로 오직 진실만을 얘기한다. 서울 양천구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연구소 법의조사과 법의관들이 시신을 부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11년 11월 대전지법 국민참여 재판정. 대전 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도박을 하던 일행 2명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된 이모 씨(53)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이 씨의 주장은 간단했다. “함께 도박을 하던 두 사람이 심하게 싸워 이를 겨우 말렸다. 옷에 두 사람의 피가 묻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 지쳐 죽은 것이다.”

숨진 두 사람은 얼굴이 뭉개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했다. 굵은 전선을 자를 때 쓰는 절단기가 범행 도구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절단기로만 80여 차례 폭행당한 흔적이 있다”는 소견을 냈다.

사건 현장에 출입한 사람은 이 씨와 죽은 2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함께 있었다는 정황만으로 이 씨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경찰은 혈흔형태 분석 전문요원을 수사에 투입했다. 벽과 천장, 방바닥 등 사방으로 튄 핏방울의 흔적을 추적해 각각의 주인을 찾아나갔다.

두 사람이 수십 차례 흉기에 맞았던 장소는 서로 달랐다. 거실과 화장실 앞, 두 사람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벽에는 160cm 정도의 남성이 흉기를 휘둘렀을 때 보이는 혈흔이 남았다. 이 씨의 키와 같았다. 피해자들의 발바닥은 깨끗했다. 서로를 공격했다면 옷과 발바닥에도 핏자국이 남아 있어야 했다. 또 이들의 몸에 남은 혈흔은 모두 본인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이 씨는 징역 17년형을 선고 받았다.

침 똥 땀, 모두가 과학수사의 단서

피가 아니라도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흔적은 과학수사의 단서가 된다. 머리카락 침 땀, 심지어 대소변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경찰이 사건 현장 주변에서 수백 개의 담배꽁초를 수거해 DNA 분석을 하는 것도, 바닥에 말라붙은 침 자국을 찾는 것도 용의자의 흔적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4월 경기 여주의 한 귀금속 상가. 2명의 남성이 출입문 강화 유리를 절단기와 망치로 깬 뒤 15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 범행에 걸린 시간은 불과 1분 남짓.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도착했을 때 범인들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단서는 현장에서 50여 m 떨어진 곳의 CCTV 한 개뿐이었다. 경찰은 용의자들이 범행 직전 담배를 피우다 바닥에 침을 뱉는 장면에 주목했다. 현장을 다시 찾은 경찰은 침 자국에서 DNA를 채취해 범인을 검거했다.

6월에는 똥이 단서가 됐다. 범인은 가출청소년 이모 군(17). 그는 길거리를 배회하다 갑자기 배가 아파오자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 용변을 봤다. 골목 구석에 쪼그려 앉아 급한 볼일을 보던 이 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반쯤 열린 식당 주방의 창문이었다. 그는 주변에 떨어진 전단지로 대충 뒤를 해결하고는 창문으로 들어가 현금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경찰은 대변과 함께 배출된 장점막 세포에서 이 군의 DNA를 찾아냈다.

땀으로 범인을 잡은 것은 8월이다. 경찰은 강원 춘천시 효자동 일대에서 잇따라 발생한 절도 사건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불과 8일 동안 신고 건수만 21차례. 피해주택마다 과학수사팀이 출동했지만 범인은 지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CCTV에도 범인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피해 가정의 화장품 박스 위에 땀방울이 떨어진 흔적이 발견됐고, DNA 분석 결과 절도 전과가 있던 김모 씨(29)의 땀으로 확인됐다. 90kg이 넘는 거구의 절도범. 그는 농촌지역이나 재개발지역의 빈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경찰의 감시망을 피했지만 결국 무더위에 흘린 땀 한 방울로 덜미를 잡혔다.

아무리 얼굴을 가려도 숨길 수 없는 것

전국에 설치된 CCTV는 300만 대에 이른다. 최근 차량용 블랙박스 설치가 늘면서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범행을 감시할 수 있는 ‘눈’이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 50만 화소 이하의 저해상도 카메라로 사건 관계자의 얼굴을 특정하기에는 ‘시력’이 좋지 않다. 또 지능화된 범인들이 CCTV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마스크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사례가 늘면서 CCTV의 미비점을 보완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찰은 ‘걸음걸이 분석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는 걸음걸이를 통해 용의자를 특정하는 증거 분석 기법으로 영국 미국 등에서는 이미 수사 단계에서부터 걸음걸이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국내에 이 기법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해 5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자택 화염병 투척 사건에서 경찰이 걸음걸이 분석으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았을 때다. 애초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임모 씨(36)를 붙잡아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기각됐다. 경찰은 영국 런던 메디컬센터(LMC) 족병학과의 권위자인 헤이든 켈리 박사를 찾아가 CCTV 분석을 의뢰했다. 그는 범행 현장 장면과 임 씨의 모습이 찍힌 CCTV를 보고 ‘두 인물은 동일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를 바탕으로 “범죄사실이 소명된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최용석 계장은 “걸음걸이 분석 기법은 단순히 팔자걸음 여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체형, 다리 길이 등과 같은 신체적 단서와 걷는 버릇이나 속도 같은 습관적 단서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며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국내 전문가가 양성되면 범인을 찾아내는 또 하나의 강력한 과학수사 기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부검의 1원칙 “죽은자는 거짓말 못해, 그것만 믿어라” ▼

죽어버리겠다는 마음 먹었어도… 자해 순간 망설여 ‘주저흔’ 남아

몸의 멍은 맞을때 생존상태 증거… “부검은 망자와의 마지막 대화

원통함 남지않게 살피고 또 살펴”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경찰의 과학수사기법이다. 현장에서 확보된 주변 증거들을 토대로 용의자를 좁혀가고 자백을 받아낸다. 용의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진술의 허점을 찾아낸다. 범인이 “나는 사건 현장에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게 과학수사의 역할이다. 죽은 사람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으니 용의자의 거짓을 하나씩 벗겨 나가는 식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늘 살아있는 사람이다. 반면 죽은 사람은 말은 하지 못해도 진실하다. 죽은 자는 자신의 사인(死因)을 입이 아닌 몸으로 증명한다. 질식해 죽은 사람은 눈꺼풀 사이 좁쌀 같은 반점이 남고, 화재 현장에서 일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사망한 사람은 손톱이 선홍색을 띤다.



‘한국 과학수사의 본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약물·독물 및 마약 분석, 화재 감정, 교통사고를 담당하는 법과학부와 변사체의 사인 및 유전자 분석, 범죄심리 분석 등을 맡는 법의학부로 나뉜다. 특히 국과수 부검실은 죽은 자의 몸을 살펴 ‘죽음의 이유와 종류’를 밝혀내는 곳으로 국과수의 핵심 공간이다. 지난해 12월 국과수를 찾은 날, 시신 세 구가 부검실로 들어왔다.

첫 번째 시신

부검대 위에 눕혀진 첫 번째 시신은 결혼식을 올린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김모 씨(35)였다. 왼쪽 가슴 부위에는 3cm 길이로 칼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검붉어진 속살이 비쳤다.

숨진 남편을 발견한 것은 아내였다. 생활비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던 중 아내는 주방에서 칼을 꺼내 남편을 위협했다. 하지만 아내는 위협만 했을 뿐 찌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나가 보니 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자살한 시체에는 보통 ‘주저흔’이 남기 마련이다. ‘죽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막상 흉기로 찌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망설여 치명상을 가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자해로 생긴 상처를 주저흔이라고 한다. 타살인 경우에는 피해자 상처의 길이가 칼의 폭보다 길고 상처 부위 주변이 손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구라도 칼을 피하려 움직이고, 찔린 뒤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대부분 찌른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비스듬한 것도 특징이다.

부검 결과 남편의 상처는 변형되지 않았다. 남편의 몸에서는 주저흔을 비롯한 다른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타살인 경우 흔히 발견되는 방어흔도 없었다. 칼로 공격을 당하는 순간 피해자는 칼날에 베이거나 찔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칼을 잡게 되는데 이렇게 생긴 손상이 방어흔이다. 

칼이 몸에 들어온 방향도 평행했다. 상처의 깊이는 가슴 근육까지 뚫을 정도로 깊었다. 손에 쥔 칼은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 관절을 축으로 움직이는데 상처 부위는 이 범위 내에 자연스럽게 위치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방배경찰서는 부검 결과를 토대로 이 사건을 자살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두 번째 시신

두 번째 시신은 부패 정도가 심했다. 발견 당시 입과 콧구멍에 유충이 득실거릴 정도로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다. 사건을 수사한 담당 형사는 부검의에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시신이 심하게 부패한 탓이 아니었다. 발견 당시 시신의 모습이 문제였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경기 고양시 인근의 산 중턱. 머리는 나무에 묶인 밧줄에, 두 다리는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려 언덕을 내려가는 승용차에 묶여 팽팽히 당겨지고 있었다. 시신은 초등학생 키 정도의 높이로 공중에 떠 있었다. 조금만 늦게 발견됐다면 부패된 시신이 밧줄의 힘에 의해 두 동강 날 상태였다.

법의관 1명, 법의조사관 2명, 법의학사진전문가 1명 등 4명으로 구성된 부검팀이 한 사람을 부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이다. 이 시신의 부검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벽과 바닥의 환풍기를 아무리 돌려대도 부검실에 찬 악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신 발견 당시 ‘1995년에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쓰레기같이 살았다. 난지도에 버려주세요’라는 유서가 함께 나왔다. 1995년은 그의 아내가 죽은 해였다. 유서가 발견됐지만 부검팀은 외상부터 철저히 살폈다. 스스로 목숨을 이토록 잔인하게 끊는 경우는 드물었다. 혹시 모를 타살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사망한 뒤에 까진 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넓고 뚜렷해진다. 상처 부위가 빨리 건조돼 색이 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눈에 더 잘 띈다. 밧줄이 감겨 있던 목과 발목에 남은 짙은 상처 외에 다른 상처는 없었다. 부검팀은 목 아래부터 성기 위까지 절개한 뒤 갈비뼈를 들어내 장기를 살폈다. 외부의 힘으로 장기가 파열되면 배 안에 피가 많이 고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양쪽 눈꺼풀에서 수많은 점출혈이 발견됐다. 눈 주변의 피부와 입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점출혈이 나타났다. 목 졸려 죽은 시신에 흔히 나타나는 흔적이다. 밧줄의 힘에 의해 목의 설골과 갑상연골도 부러져 있었다. 

목에 감긴 밧줄 외에 사인이 될 만한 소견을 찾을 수 없었다. ‘타살의 흔적 없음.’ 국과수는 1차 소견을 내놓은 뒤 장기의 성분검사 등 시신 생화학검사와 조직검사, 수사기록, 부검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최종 감정서를 작성한다. 육안의 흔적을 넘어 화학적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최종 감정서 발급까지 걸리는 시간은 3∼6주. 두 번째 시신에 대해 경찰은 자살로 잠정 결론을 내렸고 국과수의 최종 감정서를 기다리고 있다. 

세 번째 시신

넘어지거나 맞았을 때 생기는 멍도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미 사망한 시신에는 아무리 힘을 가해도 멍이 생기지 않는다. 흉기로 시신을 훼손해도 피가 잘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검대 위에 올려진 세 번째 시신 박모 씨(56). 그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박 씨가 죽은 채 발견된 곳은 경기 안양시의 한 신축건물 지하 1층 주차장. 박 씨는 전날 만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박 씨의 아내는 “집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다음 날 오전 8시경 박 씨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던 박 씨의 두개골을 열자 출혈이 발견됐다. 머리뼈는 금이 가 있었고 뇌 안쪽으로 출혈이 발견됐다. 평소 혈압이 높았지만 혈관이 터져 생긴 출혈이 아니었다. 외부 충격에 의해 생긴 흔적이었다.

부검의 첫 번째 원칙은 ‘절대 소설을 쓰지 않는다’이다. 시신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합리적인 추론만 할 뿐이다.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욕심을 내는 순간 무리하게 소설을 쓰게 되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박 씨의 시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뼈에 금이 가 있는 형태와 출혈로 미뤄 봤을 때 ‘외부의 충격’은 확인됐지만 부딪힌 것인지, 누군가가 흉기로 때린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넓은 면의 흉기로 때려 금이 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홀로 넘어져 다친 것일 수도 있다. ‘외상성 두부손상.’ 부검팀은 자의인지 타의인지를 구분하지 않은 부검 소견을 내놓았다. 나머지 사실은 경찰의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부검은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강하다. 유족들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침대에 시신이 눕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병을 고쳐서 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의 사인을 밝히려 칼을 대기 때문에 두 번 죽인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국과수 이수경 법의관은 “부검은 시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망자(亡者)와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면 그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은 흔적이라도 여러 차례 살피는 것은 혹시라도 억울함과 원통함이 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며 부검은 그런 의미에서 ‘무원(無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dong@donga.com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Y씨(당시 45세·여)씨는 범인의 인상착의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잔혹의 끝을 보았기에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2007년 4월 15일 오전 8시 45분 대전 대덕구의 건물 지하 1층 P다방. 문을 열자마자 30대 남자가 거칠게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에는 종업원 C(당시 47세·여)씨뿐이었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은 후, 날카로운 흉기가 C씨의 목을 갈랐다. C씨는 외마디 비명에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변태성욕자였던 남자는 더운 피를 쏟고 있는 시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Y씨가 다방에 출근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계산대에 있어야 할 C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범인과 눈이 마주쳤다. 범인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Y씨는 몸과 마음에 평생 남을 상처를 입고 말았다.


 
 루미놀이 찾아낸 악마의 피

 경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다방 살인현장에서 50여개의 증거물을 수집했다. 하지만 딱부러지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물은 오히려 현장 밖에서 나왔다. ‘이쯤에서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범인은 다방에서 500m 떨어진 도로변에 피묻은 휴지를 버렸다. 1.5㎞ 더 떨어진 금강변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검정 점퍼가 발견됐다. 범인은 강을 따라 도주한듯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어온 점퍼는 육안으로는 혈흔을 발견할 수 없었다. 흐르는 강물이 피의 흔적을 지운듯 했다. 

 그렇다면 이제 기대를 걸어볼 것은 ‘루미놀’(Luminol) 시험. 미국 수사드라마 CSI 시리즈에도 자주 나오는 루미놀은 사건현장에 남은 혈흔을 극소량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물질이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단 한방울의 혈액만 떨어져도 DNA를 감별할 수 있을만큼 감도가 뛰어나다. 이 때문에 주로 범인이 핏자국을 감추기 위해 증거물 세탁을 시도했을 때 유용하다. 특히 신선한 혈액보다 시간이 지난 혈흔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다. 루미놀 용액과 과산화수소수 혼합액을 핏자국이 있을 만한 자리에 뿌리면 된다. 피가 있는 자리라면 화학반응에 일시적인 발광현상을 일으켰다가 사라진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피묻은 휴지와 검은 점퍼에서 숨진 C씨의 것 말고 정체를 알수 없는 한 남성의 DNA가 동시에 검출됐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주인을 찾는 것.

 
 악마의 족보를 쫓아라

 하지만 이후로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했다. 용의자의 DNA만 확보했을뿐 이것을 누구와 비교할지가 막막했다. 이런 가운데 국과원의 다른 실험실에서는 범인을 쫓는 새로운 분석이 한창이었다. 성(性) 염색체인 Y염색체를 이용해 범인의 성(姓)이 김씨인지 이씨인지 박씨인지를 가려내는 시도였다. Y염색체는 남성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유전된다. 우리나라처럼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는 사회에서는 Y염색체의 유전적 지표(STR)를 분석해 공통점을 찾는다면 범인의 성씨를 특정할 수 있다고 국과원은 판단했다.

 국과원은 1차로 자체 보유하고 있던 동종 전과자 등 1000명의 Y염색체 STR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했다. 그 결과, 범인의 Y염색체 단상형은 오(吳)씨 성을 가진 2명과 일치했다. 국과원은 사건 현장 인근에 오씨 집성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차 분석에 들어갔다. 집성촌 주민 19명의 동의를 얻어 상피세포를 분석했다. 역시 Y염색체는 특정 부위에서 공통점을 나타냈다. 국과원은 결국 수사팀에 “용의자는 오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통고했다.

 사건발생 50여일 만인 6월 4일 경찰은 경기 광명시에 숨어 있던 범인 오모(당시 35세)씨를 검거했다. 그는 1989년 충남 연기군에서 할머니와 어린이 등 3명을 살해한 죄로 15년을 복역하고 2년 전인 2005년 만기출소한 상태였다. 17년 전 범행 때에도 시신에 몹쓸 짓을 하는 등 수법이 비슷했다. 오씨는 “돈이 떨어지자 교통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방에 들어가 금품을 빼앗은 뒤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시신에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욕을 푼 사실도 인정했다.

 당시 수사경찰은 “범인의 점퍼에서 점안액이 나왔는데, 그 안약이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병원기록을 쫓으며 포위망을 좁혀갔다.”면서 “이 과정에서 용의자가 오씨라는 국과수의 분석은 불특정다수인 점안액 구매자들 가운데서 용의선상을 압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국과원 관계자는 “지금은 살인이나 성 범죄자와 같은 흉악범의 DNA는 국가 차원에서 영구보존 하도록 해 재범 방지 등에 활용하고 있지만 2007년 오씨가 출소할 때만 해도 범죄자 DNA은행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다.

 하지만 DNA를 통한 성씨 규명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성씨가 생물학적으로만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아이를 입양했다든지 부인의 외도를 통해 임신이 된다든지 하는 변수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과원 관계자는 “한국인의 5대 성씨(김, 이, 박, 최, 정)는 본관 또한 워낙 다양해 부계 유전의 일관성이 결여되는 약점도 있다.”면서 “염색체를 이용해 성씨를 판별하는 것은 수사에서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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