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법상 최초로 실시한 ‘심리적 부검’에 참여한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민성호 교수
[청년의사가 만난 사람]
지난 2009년 11월 중년 남성이 ‘내 죽음은 사무실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부산소재 22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지방 국세청 공무원이었던 김모씨다. 유가족은 유서를 근거로 김씨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며 공무원연금공단에 유족보상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 측이 이를 거절하자 소송을 했고, 1심은 업무상 과로가 자살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지난 12월 시행된 2심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2심 재판부가 심리적 부검을 통해 김씨의 자살 원인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라면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처음으로 시행된 심리적 부검 사례다. 그 중심에는 원주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민성호 교수가 있다. 앞으로는 심리적 부검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의 원인을 규명할 때 널리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Q. 심리적 부검이라는 말이 생소한데, 간략히 설명해 달라.
- 많은 사람들이 미국 수사드라마 ‘CSI’를 통해 신체적 부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체적 부검이 사망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을 해부하거나 생화학적 방법으로 조사하는 것이라면, 심리적 부검은 타살인지 자살인지 규명되지 않은 경우 혹은 자살로 추정될 경우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심리적 부검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이번 사건과 같이 재판과정에서 사망자의 자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게 있고, 또 하나는 국가나 지역사회에서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보건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자살원인을 규명하는 역학조사 차원의 심리적 부검이 있다.
Q. 재판에서 심리적 부검을 시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던데.
- 역학조사 차원의 심리적 부검은 몇 년 전부터 시도된 적 있지만 재판과정에서 시행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재판에서도 심리적 부검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뉴욕경찰 93명의 잇따른 자살에 대한 원인을 규명한 게 (심리적 부검의) 시초이며, 핀란드는 높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심리적 부검에 대해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Q. 지금까지 이와 같은 자살은 수도 없이 일어났을 텐데, 왜 이번 사건에서 처음으로 심리적 부검이 시행된 것인지.
- 대개 자살은 자신의 성격, 음주습관, 가족관계, 대인관계, 경제적 요인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공무원 김씨는 이같은 요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판부도 ‘업무 과다로 인한 우울증’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본 것 같다. 재판부도 심리적 부검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외국에는 활성화 돼 있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시도해보려 했던 게 아닐까.
Q. 이번 심리적 부검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 지난해 5월 서울고등법원 담당판사로부터 심리적 부검을 의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지난 2008년 원주시 정신보건센터(現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자살예방 사업을 시작해 1,100여명의 자살지도자 사례관리를 해온 점, 지난 2009년에 ‘자살사망자 심리적 부검 및 자살시도자 사례관리서비스 구축방안’이라는 보건복지부 연구에 참여한 게 인연이 됐던 것 같다.
Q. 심리적 부검을 하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은 없었나.
- (심리적 부검을 하는 데 있어서) 망인의 유가족을 만나는 게 가장 어렵다. 유족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망인을 다시금 떠올리는 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족들이 면담을 회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 또한 면담 자체를 거부하는 특징이 있다.
Q. 심리적 부검은 신체적 부검과 달리 망인(亡人)의 주변 사람들과 면담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객관성 및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맞는 말이다. 2~3분 정도의 면담 조사만으로는 안 된다. (망인 주변의)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면담이 이뤄져야 할 뿐 아니라 (몇 시간을 면담하더라도) 일치되는 내용만 선택, 취합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표면적인 내용 이외에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영역까지도 검토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전문가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이번에 업무과다로 인한 우울증을 앓다 자살한 공무원 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3개월 전부터 밥맛이 없어지고 체중이 급격히 빠져 바지 사이즈가 34인치에서 31인치로 줄었다고 한다. 이는 면담과정에서 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지만 정신과적 측면에서 (우울증 진단기준을 적용했을 때) 김씨가 매우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일반인이나 경찰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세심히 살피게 된다.
Q. 이번 심리적 부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그동안은 재판과정이 개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평균적인 기준’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에는 개별화된 감정소견을 갖고 망인을 평가했다는 점이 가장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재판이 ‘개인맞춤형 재판’이란 느낌이다.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국가와 기관의 성장뿐 아니라 개인의 건강과 행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망인의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가 주어졌고 이로 인해 우울증과 같은 건강의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직장은 직원 개인의 건강을 전혀 돌보지 못했다. 이제는 국가와 고용주가 국민과 직원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할 때다.
Q. 심리적 부검에 참여한 것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 (심리적 부검으로 주목을 받는 것에) 솔직히 걱정스러운 부분이 더 많다. (심리적 부검을 하는 의사가 아니라) 자살예방 사업을 하는 전문가 입장에서 이번 재판이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시도 이유를 업무와 관련짓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쉽게 자살을 시도할까봐서다.
Q. 2014년도 보건복지부 예산 가운데 ‘심리적 부검 제도’ 도입에 10억원이 편성됐다.
-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심리적 부검이 시도됐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법, 제도적, 비용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 차원의 심리적 부검에 대한 지원은 국가나 지역사회의 자살 특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금전적인 지원 이전에 법과 제도 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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