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괴로워진다. 사람들의 법의학 지식을 마구 늘려 주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아는 게 많아지면 그들이 현장에 남기는 흔적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장에 아무것도 전혀 안 남길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남는다. 법의학에서는 이런 초미니 흔적들을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극미세 증거가 때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한 방으로 작용한다.

1. 처참하게 살해된 천안 모녀

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주택가. 유모(당시 70세)씨가 다급한 비명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집이었다. 앞마당에는 이집 딸(당시 20세)이, 안방에는 엄마(당시 48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두 명 모두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출혈성 쇼크사. 주검은 처참했다. 범인은 특히 이집 엄마에게 원한이 많은 듯했다. 목과 등에 20곳에 걸쳐 상처가 나 있었다. 딸은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을 베였다. 곳곳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족적이 있었다. 경찰은 일단 치정(痴情) 살인에 무게를 뒀다. 경찰은 150여점의 현장 혈흔을 포함해 200여개의 방대한 증거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증거가 많은 만큼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2. 증거품 200여개 중 단서 없어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원 유전자분석실. 증거는 많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용의선상에 올린 피해자 주변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현장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범인의 족적도 개수만 많았을 뿐 발 치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피 묻은 증거품이 많으면 단서가 될 만한 것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하면 피해자의 혈흔이 다른 증거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난관에 부딪친 국과원은 마지막으로 ‘최고로 구린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피해자의 집 뒤뜰에 똬리를 틀고 있던 대변이었다. 경찰은 대변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이 사건 현장의 혈흔 족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대변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이송됐다.

3. 대변에 섞여 있던 범인의 DNA

이제 해야 할 일은 대변 속에 담긴 ‘범인의 DNA’를 찾아내는 것.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 대변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DNA를 품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의 뱃속에서 다른 형태로 바뀐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대변에서 채취해야 하는 것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오는 동안 표면에 묻는 장(腸) 상피세포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꽁꽁 얼린 뒤 면봉으로 겉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대변의 속보다는 표면에 상피세포가 더 많이 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출한 세포를 원심분리기와 증폭기에서 돌렸다. 얼마 후 대변의 주인이자 DNA의 주인인 범인이 밝혀졌다.

이웃집 남성 천모(55)씨였다. 천씨는 살인에 썼던 도구를 몰래 버리는 모습까지 경찰에 발각되자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천씨는 “죽은 여인이 내가 과거 절도범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내 애인 등에게 떠벌리고 다녀 이를 따지러 갔다가 홧김에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 3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고도 했다.

4. 카펫 섬유·모발… 작아서 장점이자 단점

미세증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피해자를 말았던 카펫에서 나온 섬유,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모발, 범행도구에 묻은 페인트 등이 말하자면 모두 미세증거물이다. 대변은 미세증거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처럼 대부분 미세증거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눈에 안 띌 정도로 작다는 것은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장에서 증거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범죄자가 흔적으로 남겨 놓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덕에 현재 수사 당국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세한 물품에서도 증거를 가려낼 수 있다.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1g)만큼의 극미세 DNA도 검출해 주인을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오염도 쉽고 분해되는 일도 많은 DNA가 원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5. 에필로그:범인의 대변 긴장 탓? 미신 탓?

천씨는 왜 화단에 대변을 본 걸까.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본인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흉기를 품에 지니고 피해자 집에 간 점 등을 감안할 때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었다.”면서 “아무리 간 큰 범죄자도 범행 전엔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천씨의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절도범의 미신’ 때문으로 추측했다. 그는 “절도범들은 범행 현장에서 대변을 보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데, 과거 절도 경력이 있던 천씨가 그대로 따라 했을 수 있다.”고 했다.


whoami@seoul.co.kr






강도나 살인, 납치 등 강력범죄 사건에서 미세증거물에 대한 분석기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범죄가 지능화되면서 지문, 족적, 혈흔 등 범인 추적이 가능한 증거물들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연구팀이 이 같은 미세증거물을 통해 뺑소니 차량의 차종과 제조연도, 시신의 사망추정시간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는 첨단과학수사 분석기술을 개발했다. 

범인 잡는 화학적 지문

미세증거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현미경, 돋보기 등의 장비를 이용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범죄 증거를 말한다. 모발과 흙, 페인트·섬유·플라스틱·유리 조각 등이 여기에 속하며 지문, 족적, 혈흔 등과 달리 눈에 잘 띄지 않아 범인이 간과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때문에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미세증거물들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미세증거물의 경우 일반 증거물보다 분석이 쉽지 않다는 것. 동위원소나 미량원소에 대한 정밀 분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 요구된다. 미세증거물을 '화학적 지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환경과학연구부 류종식 박사팀과 생명과학연구부 최종순 박사팀이 첨단장비를 활용해 미세증거물의 활용도와 분석의 정확도를 대폭 향상시키는 첨단과학수사 분석기술을 연구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뺑소니 사고 검거율 100%를 향해

류 박사팀은 현재 유리와 거울조각만으로 자동차의 차종과 연식을 정확히 알아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용 유리와 거울이 제조사나 생산공정에 따라 구성물질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류 박사는 “결정화 과정 없이 단단하게 냉각된 융합무기물인 유리는 미량원소를 포함, 약 30여종의 물질로 구성돼 있다”며 “제조사나 제조공정별 미량원소에 차이가 발생하므로 작은 유리조각 하나로도 차종과 연식의 확인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국내 5대 완성차 메이커에서 사용 중인 자동차 옆 유리 36종과 사이드미러 120종을 분석했다. 각 제품을 파쇄해 표면의 불순물을 완벽히 제거한 뒤 레이저 삭박 유도결합 플라즈마 질량분석기에 넣은 결과, 자동차 회사마다 납(Pb) 동위원소 조성비에 큰 차이가 있음이 확인됐다. 각 유리와 거울의 제조사별 차이도 명확했다.

류 박사는 “자연계의 납 동위원소는 208Pb·207Pb·206Pb·204Pb 등 4종이 존재하는데 이번 연구를 통해 완성차 메이커별, 유리·거울 제조사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며 “유리와 거울조각은 차량사고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미세증거물이기 때문에 매년 1만1,000건 이상 발생하는 뺑소니 사고 등의 해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시간 알려주는 종이 칩

최 박사팀의 경우 살인사건 피해자, 즉 시신의 사후경과시간(PMI) 판정기술 개발에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PMI를 정확히 알아내면 피해자의 사망추정시간에 맞춰 용의자의 범위를 압축, 신속한 수사진행이 가능하지만 현재는 체온, 혈액 침하, 사체 경직, 부패 등 주변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요인들에 의존하면서 정확성에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연구팀은 오랜 연구 끝에 흰쥐의 장기에서 시신의 장기나 체액으로 PMI를 객관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생화학적 마커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마커를 바탕으로 사건 현장에서 손쉽게 사용 가능한 종이소재의 PMI 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있다.

이 키트는 임신진단 키트처럼 칩에 체액을 떨어뜨리면 10분 이내에 결과가 나타나는 방식으로 구동된다. PMI 다중 단백질 마커들의 존재 유무로 PMI를 추정하는 메커니즘이다. 최 박사는 “현재 국내의 PMI 판정 기법은 법의학자의 개인적 경험에 많이 좌우돼 정확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며 “향후 PMI 진단 키트 개발이 완료돼 본격 보급되면 살인사건의 초동과학수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기초지원연의 첨단과학수사연구 사업책임자인 이광식 선임본부장은 “첨단과학수사연구는 신속·정확한 사건 해결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전한 사회를 구현하는 국민 친화적·사회 친화적 과학기술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nbgk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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