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보편적 원리 중 하나는 실제 회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은 저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재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199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보

2003년 3월 23일 새벽 인천 중구의 한 무역회사 사무실. 이곳 사장 K(당시 46세·여)씨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무슨 원한에서인지 범인은 잔혹하게도 그녀의 몸을 17차례나 반복해 공격했다. 사인은 다발성 자창(刺創). 과다출혈로 말미암은 쇼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감식반은 몇 번이고 현장을 뒤졌지만 혈흔도, 지문도, 족적도 찾을 수 없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어렵사리 목격자를 한 명 찾아냈다. 사건이 나던 날, 옆 건물에서 야간 경비를 섰던 A씨였다. A씨는 자정 무렵 문제의 사건 현장으로 누군가 차를 몰고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진술이 구체적이지 않았다. 차의 번호는 물론이고 종류나 색상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피곤함에 지친 야간 경비원이 옆 건물까지 챙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지능적인 범인은 칠흑 같은 밤 차의 미등까지 끈 채 차를 몰았다. 

경찰은 A씨의 동의를 얻어 법최면(Forensic Hypnosis) 수사를 시도했다. 흐릿한 그의 기억 속에서 범인의 흔적을 끌어낼 마지막 기회였다.

“시간을 5일 전으로 돌립니다. 당신은 야간 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간 A씨의 뇌는 사건에 관한 정보를 기대 이상으로 많이 담고 있었다. 언뜻 보긴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 뇌 한쪽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다. 법최면은 이런 기억의 파편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A씨는 차량이 들어온 시간을 22일 밤 11시 40분쯤으로 기억해 냈다. 주차 후 차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는 용의자의 뒷모습도 기억해 냈다. 평소에 보던 옆 회사 직원은 아니라고 했다.

최면 수사관은 다시 A씨의 기억을 23일 새벽 1시 30분으로 되돌렸다. 앞서 낯선 차가 빠져나갔다고 진술한 시간이다. 그렇게 기억의 실타래를 찾는 도중 A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남자가 황급히 나와 시동을 걸고 있어요. 화물차와 부딪칠 뻔하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어요. 어어… 차의 모습이 보여요.”

A씨의 뇌는 용케도 브레이크 등이 켜지는 찰나 잠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동차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는 빨간색, 일반 세단과 달리 트렁크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A씨는 또 다른 목격자가 있음을 기억해 냈다. 부딪칠 뻔한 화물차 운전사였다. 경찰은 해당 차량을 수배했다.

●잘못된 정남규 몽타주 바로잡아

법최면은 범죄 수사에 최면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건 현장에 단서는 없고 목격자나 피해자만 있을 때 최면을 걸어 희미한 기억을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수사에 필요한 단서를 끌어내는 수사 방식이다. 최면은 이렇게 뇌 어딘가에 숨어 있는 기억을 끌어내는 단서를 제공한다. 강호순과 정남규, 유영철까지 최근 초강력 흉악범죄 수사에는 모두 최면 수사가 활용됐다. 아직 최면을 통해 얻어낸 목격자 진술의 법적인 증거 능력은 없다. 단, 모아 낸 증언을 통해 악마의 퍼즐과도 같은 사건을 재현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증거를 잡아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최면 수사가 ‘기억의 왜곡’을 수정하는 역할도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몽타주다. 보통 범죄 피해자들이 기억하는 범인의 얼굴은 실제보다 험상궂다. 두려움의 기억이 용의자의 인상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법최면은 이런 오류를 최대한 보정한다.

실제 비 오는 목요일의 살인자로 불린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범 정남규도 이렇게 만든 몽타주에 꼬리가 밟혔다. 2004년 2월 주택가 뒷골목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며칠 후 한 30대 남자가 현장 근처 중국집을 찾아왔다. 며칠 전 여자가 죽지 않았느냐고 물은 그는 주변을 서성이다 사라졌다. 경찰은 범행 현장을 다시 찾은 범인이라고 여겨 중국집 종업원에게 최면 수사를 시행했다. 중국집 종업원의 최면 속에서 떠올린 얼굴. 2년 후 정남규를 잡은 수사관들은 깜짝 놀랐다. 몽타주가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범인·비밀 있는 사람은 최면 잘 안걸려

그럼 최면은 누구에게나 통할까. 답은 ‘아니오’다. 최면은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찾아내는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혼수상태처럼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최면에 절대 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겐 최면을 걸 수 없는 이유다. 어렵게 최면을 거는 데 성공한다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에 대해선 입을 닫는다. 이 때문에 범인 또는 경찰에게 뭔가 숨기고 싶은 사람에게 최면 수사는 무의미한 결과만을 가져온다.

10년 전인 2001년 5월 19일 서울 성동구 주택가에서 토막 난 4세 여아의 시신이 발견됐다. 9일 전 실종된 아이였다. 다시 3일 뒤 경기 광주의 한 여관에서 아이 시신의 나머지 부분이 발견됐다. 그 방에 투숙했던 손님이 놓고 갔다고 본 경찰은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아내기 위해 여관 여종업원에게 최면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경찰은 최면 수사를 포기했다. 최면 유도가 반복됐지만 여종업원은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종업원은 최면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최면 유도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최면 수사관은 담당 형사에게 “여자가 뭔가 수상하다.”고 귀띔했다. 수상한 여성의 진실은 일주일 후 범인이 잡히고 나서 밝혀졌다. 종업원은 여관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은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성매매 사실이 경찰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뇌를 굳게 닫은 채 최면을 거부했던 것이다.

●최면은 ‘마법의 물약’아닌 연구해야 할 과학

최면 유도에는 개인차도 있다. 이를 최면감수성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감정 표현이 자유롭고 집중력이 강한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은 최면에 잘 걸린다. 반면 매사에 의심이 많고, 비판적인 판검사, 형사, 기자 등의 직업군은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치는 않지만 최면이 걸린 상황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를 속여 마음속에 거짓을 진실이라고 각인해 놓은 경우다. 단언컨대 최면은 판타지 영화 ‘해리포터’ 속의 ‘베리타세움’(진실을 말하게 하는 마법의 물약)이 아니다. 오히려 더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과학’이다. 그만큼 철저한 전문가 양성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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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한 두 물체 사이에는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에드몽 로카르·1877~1966)

근대 법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카르의 ‘교환법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학들에게 절대명제로 여겨진다. 수사관과 감식반원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현장을 수십번씩 뒤지고, 부검의가 시신 옆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불안감에 떠는 사람들도 있다. 범행현장 또는 시신과 접촉했던 범인들이다.

●변태성욕자인 척 하고 싶은 좀도둑의 트릭(?)

2007년 1월 8일 새벽 2시 부산의 어느 동네. 가게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를 받고 달려간 현장. 절도 사건의 목격자를 찾으려고 옆집을 찾아간 김 순경이 마주친 것은 집주인의 시신이었다. 다락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람은 식당 주인 A(여·당시 62세)씨였다.

시신은 빨간 겨울 점퍼에 방한바지를 입은 채 전기장판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겨울 밤 난방이 안 되는 다락방으로 추위가 들어올세라 단단히 채비를 했지만 불청객의 침입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방안은 말끔했다. 범인이 깔끔하게 치운 게 아니라면 피해자가 순식간에 당했다는 얘기다. 노인의 양쪽 눈꺼풀에선 일혈점이, 얼굴에는 울혈이, 목에는 까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목졸림에 의한 질식사로 보였다. 주름진 손가락엔 반지 자국만 남아 있었다. 평소 노인이 끼던 금가락지를 빼간 것이다. 감식을 진행하던 형사가 순간 눈을 찡그렸다. 범인이 사망자의 시신을 훼손했기 때문이었다.

“반장님. 이거 완전 변태 아잉교. 동종 전과자부터 뒤져 볼까예.”

“미리 단정 짓지 말그라. 놈이 잔머리 굴리는 걸 수도 있다.”

범인이 현장에 접근한 경로는 죽은 노인의 목에 새겨져 있었다. 경찰은 목덜미에 작은 나무가시들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가시는 식당 뒤쪽 허름한 합판으로 만든 나무 문과 같은 종류였다. 지난밤 범인은 장갑을 낀 채 힘으로 나무문을 밀고 들어왔고, A씨의 목을 조르는 과정에서 앞서 장갑에 묻은 나무가시가 다시 피해자에게 옮겨 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했다. 실제 뒤쪽 나무문은 누군가 강제로 부수고 밀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범인은 적어도 가게 구조를 아주 잘 아는 사람. 하지만 한밤엔 주인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숨어야 하는 관계였다.

피해자가 옷을 입은 상태로 숨진 탓에 감식은 겉옷부터 하나씩 안쪽으로 진행됐다. 테이프를 이용해 세밀하게 미세증거물을 수집하는 과정이다. 노인이 입고 있던 빨간 점퍼에서는 파란색 섬유 몇 올이 발견됐다.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몇 올의 섬유가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될까. 답부터 이야기하면 ‘그렇다’다. 섬유는 일상적인 접촉만으로도 생각보다 많은 양의 전이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외제 오토바이가 탐이 나 누군가 안장에 한번 앉아 봤다고 치자. 인조가죽으로 만든 안장에 뭐가 남았을까 싶겠지만 앉은 자리엔 바지 섬유가 전이된다. 물론 오래 앉아 있을수록, 강하고 거칠게 비비며 뽐낼수록 떨어져 나가는 섬유의 양은 늘어난다. 

작은 양이지만 무슨 바지를 입은 사람이 안장에 앉아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접촉 조건(면의 거칠기나 접촉 강도)이 같다면 섬유의 길이와 굵기, 직조 방법 및 성분에 따라 전이되는 양도 달라진다. 

범행 현장에서 섬유증거가 발견되면 수사관들은 될수록 증거물이 인조섬유이길 바란다. 같은 옷이라도 부위별로 섬유의 굵기, 염색의 정도, 꼬임의 양 등이 천차만별인 천연 섬유보다는 인조섬유 쪽이 증거 능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신의 손톱 밑에서 미세한 혈흔이 발견됐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조차 DNA가 나올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할 만큼 적은 양이었다.

●파란 점퍼가 주인의 목줄을 죄다

범행 일주일째. 형사들은 식당 주변에서 탐문조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올리지는 못했다. 복잡한 사건에 얽히고 싶지 않은 탓인지 주위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그러던 중 주민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동네 건달인 B(49)씨가 최근 “금반지를 팔았는데 돈이 꽤 나가더라.”고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직업도, 가족도 없는 그에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금붙이가 생길 리 없다는 생각에 동네 사람은 수군댔다. B씨는 죽은 A씨의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어 누구보다 집 구조를 잘 알았다. 경찰은 일단 B씨를 만나 보기로 했다.

“어데예. 증거 있습니꺼.”

경찰서에서 B씨는 큰소리부터 쳤다. 일종의 자기방어인 듯했다. 그러나 목소리와 눈빛의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코에는 손톱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죽은 A씨가 마지막 남긴 방어흔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아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정황만으로 그를 잡아 놓을 수는 없었다. 경찰은 일단 B씨의 손톱과 타액을 채취하고 일단 그를 풀어 줬다.

다음 날 날아온 국과수 감정회보서에는 피해자의 손톱 밑 혈흔과 B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용의자는 경찰서를 나오자마자 도망쳤다가 형사들에게 잡혀 왔다.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경찰은 용의자의 집에서 찾은 또 하나의 증거를 들이밀었다. 죽은 노인의 몸에 섬유 증거를 남겼던 바로 그 파란색 점퍼였다. 범인은 증거가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에 옷을 세탁했지만 점퍼엔 여전히 문을 통과할 때 묻었던 나무가시가 남아 있었다. B씨는 고개를 떨궜다. 곗돈을 탔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만 훔치러 들어갔다가 걸려 얼떨결에 살인을 했다고 했다. 치정살인이나 변태성욕자의 살인으로 가장하기 위해 시신을 훼손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혈혈단신인 그에게 늘 따듯한 밥 한 공기를 건네며 가족처럼 챙겨줬던 은인을 살해하고 B씨가 챙긴 돈은 11만 8000원과 금가락지 한개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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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라꼬예? 같은 신고만 벌써 5번째 아잉교? 근데 가봤더니 아무 것도 아이던데예.” “그기 아이라 사람이 죽었다니까요.” 2001년 7월 27일 경남 창원의 한 오피스텔. 결과적으로 경찰은 이틀간 같은 집에 5차례나 출동해서야 빼어난 미모의 죽은 여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망자는 인근에서 소주방을 운영하는 A(당시 41세)씨였다. 장롱 속 시신을 발견한 것은 남동생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열어 본 옷장에 그녀는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다. 시신 발견 시간을 늦추기 위해 누군가 그녀를 옷장 속에 넣어 놓은 것이었다. 이틀 전 이웃들은 심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어 신고했다고 했지만, 누가 드나들었는지 본 사람은 없었다.

범인은 A씨의 손과 발을 묶은 후 장롱 속에 욱여넣었다. 얼마간을 웅크려 있었는지 피가 몰린 자국인 시반이 등에 몰려 있었다. 피살자의 목에는 스타킹과 실타래가 칭칭 감겨 있었다. 손으로 목을 조른 후 스타킹 등으로 다시 한번 숨통을 조인 듯 보였다. 배꼽 위에는 6㎝ 정도 칼에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싱크대 위 피묻은 과도가 범행 도구였다. 

직장(直腸)온도 등을 통해 대략 계산한 A씨의 사망추정 시간은 약 48시간 전. 하지만 경찰은 정확한 시간은 탐문수사를 통해 확인하기로 했다. 시신의 부패가 진행 중이면 과학수사반은 헨스게 도표 등 일반적인 사망시간 추정법을 쓰지 않는다. 무리한 계산으로 오차 범위가 늘면 오히려 수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망시간을 찾아내는 연구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여전히 미완의 단계다.

●3명의 남자 DNA 범인은 그중 하나

A씨가 혼자 살았던 오피스텔은 살인현장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출동한 경찰은 이 때문에 출동했다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손님이 왔었는지 방바닥엔 과일 접시와 2개의 방석이 놓여 있었다. 싱크대 속 밥공기도 2개였다. 반면 어디에도 외부침입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면식범에 의한 살인이라고 판단했다. 범인이 시가 200만원 상당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 가지 않은 것도 이런 확신을 뒷받침했다.

4차례에 걸쳐 정밀 감식이 진행됐다. 감식반은 숨진 A씨를 덮었던 이불과 쓰레기 속 휴지,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 지문이 묻은 생수통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청으로 보냈다. 검사 결과 현장에서 확인된 DNA는 모두 3개였다. 범인이 죽은 그녀 위에 덮어 놓았던 이불,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 쓰고 난 휴지에서 각각 다른 세 남자의 DNA가 검출됐다. 

이불에서 나온 것은 A씨의 애인 B씨 DNA였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그는 “애인 집에서 내 DNA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 않으냐.”며 펄쩍 뛰었다. 그는 사건 전날 A씨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나마 밖에서 만났고 그 후에는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B씨는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경찰은 휴지와 담배꽁초에 흔적을 남긴 남성 2명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DNA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 남편과 그녀가 운영하던 소주방의 단골, 이웃집 남자 등 경찰은 무려 100여명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지만 모두 DNA가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문감식 결과도 실망스러웠다. 범인을 잡았을 때 대조는 가능하지만, 해당 지문만으로는 범인이 누군지 특정할 수 없다는 결과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 남자가 남긴 립스틱 자국

사건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수사팀이 통신회사에 의뢰한 오피스텔 전화통화 내역이 날아왔다. 경찰은 당일 오전 8시 13분 마산의 한 지하상가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에 주목했다. 죽은 여성 A씨의 마지막 통화였다. 2분 49초 동안 A씨와 통화한 그는 같은 장소에서 연달아 2통의 전화를 더 걸었다. 경찰은 해당 통화내역을 따라갔다. 그곳은 M주점과 B단란주점이었다. 

두 주점과 A씨 소주방 사이에 공통점이 발견됐다. 최근 생활정보지에 여종업원 구인광고를 냈던 것이었다. M주점 사장은 수화기 너머 공중전화로 걸려온 통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종업원을 구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목소리가…, 어딘가 남자 같았어요.”

순간 수사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담배꽁초에 남은 립스틱 자국이었다. 

“왜 그걸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범인은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어.”

경찰은 트랜스젠더인 남자가 피해자와 구직 문제로 통화를 하고 그의 오피스텔을 방문했다가 범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그 일대 주점에는 트랜스젠더 한 명이 여종업원이 되고 싶다며 술집을 찾아왔다가 거부당하면 행패를 부리고 돈을 뜯어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추정연령도, 인상착의도 같았다. 경찰은 이 사람을 찾는 데 총력을 다했다. 전국 경찰서를 상대로 트랜스젠더 관련 사건을 확인한 결과 제주에서 트랜스젠더 한 명이 술집 주인으로부터 돈만 챙겨 달아난 사건이 접수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이 확인한 그의 신원은 C(31)씨. 놀랍게도 범행 현장 생수병에 남긴 지문은 그의 오른손 지문과 일치했다. 결국 경찰은 고향으로 도주한 C씨를 검거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는 최근 마산·창원·부산 일대를 돌며 술집 일자리를 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8년 동안 여성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성 전환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주인들은 그를 내쫓기 일쑤였다. 사회가 자신을 차별한다고 생각한 C씨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행패를 부리거나 난동을 피웠다. 그렇게라도 돈을 받아내야 분이 풀렸다.

시신이 발견되기 이틀 전인 7월 25일, 아침 일찍 A씨와 전화통화를 한 그는 밤 10시쯤이 돼서 A씨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일종의 면접이었는데 이야기가 잘 풀렸다. A씨는 마치 친언니처럼 C씨를 대했다. 저녁을 못 먹었다는 말에 선뜻 미역국에 밥까지 내줬다. 그렇게 고용 계약을 할 때쯤 C씨는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1번으로 시작하는 주민증을 본 A씨는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남자를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C씨가 한바탕 악담을 퍼붓고 오피스텔을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A씨가 최후의 한마디를 했다.

“별 미친 놈 다보겠네. 세상이 참말로 말세다 말세….”

C씨는 순간의 분을 참지 못했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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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강도를 당했습니다. 여자 승객이 납치됐어요….” 

2003년 4월 14일 새벽 경기 부천중부경찰서 관내 한 파출소. 왼손을 감싼 택시기사 A(당시 35세)씨가 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 손가락을 칼에 심하게 베인 상태였다. 경찰은 A씨를 일단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금 자기가 당한 납치 사건을 신고했다. 

그는 2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을 태운 것은 오전 5시 30분쯤이라고 했다. 

“손님을 조수석에 태우고 가다가 신호에 걸려 서 있는데 남자 2명이 갑자기 뒷문으로 들어오더라고요. 합승 손님인가 했는데 난데없이 그 손님을 찌르고 저도 공격했어요. 바로 칼을 겨누곤 고가도로 밑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는 차를 세운 뒤 정신없이 도망쳤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칼에 찔린 여자 손님을 뒤따라온 검은색 쏘나타에 태워 달아났다고 했다. 

●돈 버리고 납치… 이상한 택시 강도 

A씨의 말대로 여자 손님은 조수석에서 칼에 찔린 듯했다. 흥건히 젖은 조수석은 상황의 심각성을 말해 줬다. 무엇보다 앞좌석을 적신 출혈량이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 끌려다닌다면 납치된 여성은 한두 시간 안에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경찰은 관내에 비상을 걸었다. 

감식반원들은 좀처럼 범인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괴한 2명이 칼을 휘둘렀다는 뒷좌석은 앞좌석보다 깨끗했다. 콘솔박스 앞에는 현금 3만원과 여성의 신용카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범인들이 신용카드를 빼앗으려 했다면 카드에 지문 같은 흔적이 남아 있을 터. 감식반은 가변광원기를 들이댔지만 뭉개진 몇 개의 지문만 발견됐다. 조수석 시트 밑엔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납치된 여성의 것이었다. 

“이거 돈 훔치려던 강도들 맞아? 그냥 다 두고 갔어. 좀 이상한 놈들인데….” 

택시 강도는 큰돈을 노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벌이가 뻔한 택시를 노리는지라 100원짜리 동전까지 털어가기 마련이다.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운전석 바닥엔 흙이 묻어 있었다. 차량 바퀴와 휠에는 흙탕물이 튀겨 있었다. 택시를 꼼꼼히 살핀 한 베테랑 감식반원이 택시기사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시 외곽에서 손님들을 받았나 보죠?” 

“아니요. 전 시내만 뛰는 걸요.” 

몇 시간 뒤 전화가 울렸다.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현장 보고였다. 최초 택시 강도 신고가 들어온 파출소에서 불과 2㎞ 남짓 떨어진 하천변. 수사반은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농로로 쓰이는 곳이라 곳곳이 심하게 파인 곳이 많았다. 

숨진 여인은 B(21)씨.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꿈 많은 초보 회사원에게 범인은 사정 없이 칼을 휘둘렀다. 범인은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끌어내려 20m가량 데려간 듯 보였다. 혈흔은 다리 위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경찰은 혈흔과 주변 흙을 모아 담았다. 6시간가량 현장 감식을 마치고 오는 길. 감식반원은 웅덩이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고참 감식반원은 흙탕물을 용기에 담았다. 

“선배 뭐해요?” 

“범인 잡아야지….” 

며칠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감식 결과가 나오자 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차를 몰았다. 형사들이 몰려간 곳은 신고자 A씨의 집이었다. 

“당신을 강도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경찰은 처음부터 A씨가 미심쩍었다. 방금 겪은 일을 말하는 사람치곤 진술 내용이 허술했다. 특히 강도를 당할 때 상황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그나마 일관성 있게 진술한 내용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굳이 손님까지 탄 택시를 범행 대상으로 고른 점이라든가, 돈은 놔두고 손님을 납치해 간 점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결정적으로 A씨가 범인임을 알려준 것은 흙이었다. 운전석 깔판 밑과 운전석 하부에 붙은 흙을 분석한 결과 피해 여성이 발견된 하천변 토양과 일치했다. 택시 바퀴와 뒷문 문짝에 튄 흙탕물 역시 진입로의 웅덩이 성분과 정확히 일치했다. 택시 기사는 다리 밑에 그녀를 버린 뒤 택시 강도를 당한 척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똑같아 보이는 흙… 1100가지 색을 담다 

흙의 성분은 어떻게 구분할까.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광물학적인 분석으로 편광현미경 등을 이용해 조암광물의 형상과 입자 상태 등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광물은 3000여종. 하지만 기본 구성물인 조암광물은 수십종뿐이다. 법과학은 이 조암광물을 분석하고 따라간다. 

두 번째는 흙 속에 함유된 유·무기물 성분 등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크로마토그래프법, 열분해 분석법, X선법 등이 있다. 흙 속에 함유된 유·무기물 성분은 그것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또 그 지역에 어떤 동물과 식물이 살고 있는지 등에 따라 색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외국 연구 결과에 따르면 토양은 색상에 따라 1100여 가지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토양 감정이라고 하면 흙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감정은 흙 속에 섞여 있는 기름이나 유리, 비료, 농약, 심지어 섬유까지 대상으로 한다. 

현장에 방울져 떨어져 있던 적하(滴下) 혈흔도 A씨 검거에 큰 역할을 했다. B씨가 이미 살해당한 뒤 하천변에 버려졌다면 현장에는 다수의 적하 혈흔이 남아 있기 힘든 상황이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은 현장의 혈흔을 수거해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했고, 피는 택시기사 A씨의 것으로 판명 났다.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과정에서 생겨난 상처였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증거에 A씨는 입을 열었다. 7개월 전부터 개인택시 영업을 했지만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다고 했다. 무리하게 택시를 구입한 데다 이전의 카드값까지 밀리면서 빚이 1억 5000만원까지 늘어나자 자기 택시를 이용해 강도짓에 나섰다고 했다. 

국과수는 또 하나의 안타까운 검사 결과를 통보했다. 숨진 B씨의 폐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됐다. 그가 죽었다고 여긴 그녀가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A씨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whoami@seoul.co.kr






“김 사장, 우리 집사람이 전화를 통 안 받네. 미안하지만 2층 좀 올라가봐 줘.” 2005년 6월 8일 오전 10시쯤 부산의 한 중국 음식점. 가게 문을 열자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위층 남자였다. 멀리 출장 나와 있는데 집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중국집은 얼마 전까지 위층에서 운영했던 터라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일종의 ‘개구멍’이 나 있었다. “아주머니. 저 아래층입니다.” 중국집 김씨는 빠끔히 머리를 내밀어 2층 내부를 들여다봤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밀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김씨는 기절초풍을 했다. 1층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전화를 찾았다. “여기 ○○반점 2층인데요. 사, 사람이 죽어 있어요.”

●LCV가 찾아낸 피 묻은 신발 자국

감식반이 확인한 시신은 2층 안주인 A(당시 63세)씨였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범인은 A씨의 머리와 옆구리 등을 흉기로 24차례나 찔렀다. 목을 조른 흔적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뒤엔 그 모습이 참혹했는지 시신 위에 옷가지를 수북이 덮어 두었다. 집 안이 어두운 건 두꺼비집(분전함)이 내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문을 연 흔적도 없었고, 패물 등 사라진 것도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에 무게를 뒀다. 집 안 곳곳에 뿌려진 혈흔들을 볼 때 사망자는 숨이 다하기 전 범인과 꽤 오랫동안 몸싸움을 한 듯했다. 그러나 지문 등 범인의 흔적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여기 발자국이 있는데요.”

감식반원이 가리킨 곳에 별 모양의 신발 자국이 보였다. 235~240㎜가량의 운동화 아니면 등산화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여자인가? 아니면 발이 매우 작은 남자인가?

살인 현장에서 혈흔 족적이 발견되면 감식반은 LCV(Leuco Crystal Violet)나 루미놀(Luminol) 등 특수 시약을 쓴다. 범인의 발 크기와 신발 종류 등을 분명하게 알아내려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화학적인 흔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LCV는 혈흔 속의 단백질에 반응한다. 보통 때는 무색의 액체지만 혈흔과 만나면 자주색으로 변한다. 비교적 시약을 만들기가 쉽고 밝은 곳에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루미놀이나 플루오레세인 등도 이용된다. 피가 있는 자리에 발광 현상을 일으키는 루미놀은 시약을 만들기가 쉽지만 반응이 일시적이고, 주위가 어두워야 하는 단점이 있다. 플루오레세인은 반응의 결과물이 매우 밝고 오래 가지만, 자외선 같은 가변광원을 이용해야 하는 데다 만들기도 비교적 까다롭다.

경찰은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용의선상에 올렸다. A씨의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벽부터 여러 차례 집에 전화를 해 대고, 마치 독촉이라도 하듯 현장에 1층 주인을 가 보라고 한 게 오히려 더 의심을 샀다. 출장이라고 간 곳도 자동차로 고작 100여분 거리. 마음먹기에 따라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하는 데 충분했다.

두 번째 용의자는 A씨에게 5000만원을 빚지고 도망간 B(당시 45세)씨. 한때 둘도 없이 친했지만 돈이 걸리면 언제든 독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어서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마지막 용의자는 피해자에게 5000만원을 빌려 준 남편의 친구 C(당시 66세)씨. C씨는 A씨의 시신이 발견되기 3시간 전인 아침 7시쯤 현관까지 왔다가 안에서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역시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했다. 2년 전 아내가 집을 나간 C씨는 본인은 그날 저녁 혼자 잠을 잤다고 했다.

●60대 살인자가 사용한 교묘한 술책

이상한 것은 용의선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235~240㎜의 신발에 맞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가 날아왔다. 죽은 A씨의 손톱 밑 혈흔이 C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범인의 흔적을 담아낸 셈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할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담당 형사와 C씨 간에 피 말리는 심리전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10여 시간. 굳게 닫혀 있는 60대 범죄자의 입이 결국 열렸다.

“제가 죽였습니다.”

C씨가 진술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남편이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인지 A씨와 C씨는 자주 왕래를 하다가 각별한 사이가 됐다. 그렇게 4년. 관계가 깊어지면서 A씨는 필요할 때마다 C씨에게 돈을 융통해 썼다. 그러다 둘 사이에 결정적인 갈등이 생겼다.


“제가 사정이 급해져서 꿔준 돈을 돌려받으려 하자 A가 냉정하게 돌아서더군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매몰차게 거절하는데 정말…, 그런 배신감과 분노가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결국 그는 등산용 장갑을 끼고 칼을 챙겼다. 폐쇄회로(CC) TV에 찍힐 수 있다는 생각에 커다란 등산용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평소 자기 차에 보관해 두고 있던 A씨의 등산화를 신었다. 현장에 족적이 남을 것을 예상한 술책이었다. 그는 한때 사랑했던 여성에게 스무 번 넘게 분노의 비수를 꽂았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을 즈음 담당 형사의 새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2년 반 전 집을 나갔다는 C씨의 아내(실종 당시 58세)에 대한 수사였다. A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는 C씨 부인이 단순하게 실종된 게 아니라고 직감했다. 말을 할 때마다 C씨의 이야기는 엇갈렸고, 손과 눈빛이 떨렸다.

“부인은 어디에 있나요.”

“…”

얼마의 침묵이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집요.”

“만기가 다가오던데, 보험금 타려고 그간 숨어 지낸 건가요.”

“아니요. 몸은 마루에 있고, 머리는 안방 침대 밑 바닥에 있어요.”

그는 2002년 10월 28일 자신의 목공소에서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다음 날 집 한켠에 묻었다. 여자가 남편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는 게 살해 동기였다. 이듬해 초 집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는 아내의 시신을 꺼내 머리와 몸통을 분리한 뒤 안방과 현관 마루 쪽에 각각 묻었다. 처음 묻으려던 현관이 비좁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매일 잠을 자던 곳은 아내의 머리가 묻힌 쪽이었다.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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