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오현지 기자]'TV회고록 울림'에서 법의학자 문국진이 출연한다. 부검에 대한 반발이 있던 시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TV회고록 울림'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다룬다. 12일 방송되는 'TV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 문국진이 출연한다. 

13일 아침 7시 5분 'TV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 법의학의 태두 문국진 박사의 첫 번째 이야기가 공개된다. 

소나기가 만들어 준 인연, 법의학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다.

우산 없이 만난 소나기 때문에 급하게 들어간 헌 책방에서 '법의학 이야기'란 제목의 일본 책을 발견한 문국진. 당시 의과대학 3학년이었던 그는 ‘의학과 법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는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그 책은 대학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학문을 다루고 있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과 권리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임상의학이고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말이 후루하타 타네모토 저서 '법의학 이야기'에 적혀 있었다. 

책의 서문을 읽자마자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문국진. 마치 홀린 것처럼 그 책을 사와 밤새 읽고 또 읽었다.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옹호하는 의학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은 문국진은 난생 처음 본 학문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법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운 일본은 법의학이 발달했지만 해방 후 수교를 맺지 않아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는 상황. 스승을 찾아 밀항을 꿈꾸기도 했다는 그의 험난했던 법의학 개척기가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펼쳐진다. 
  
도끼에 맞아죽을 뻔한 법의학자 문국진, 그가 법의학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졸업 후 법의학자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문국진. 다행히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창설되면서 그는 정식으로 국내 최초의 법의학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제대로 된 부검실도 갖추지 못한 열악한 국과수 시설보다 그를 괴롭게 한 것은 법의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부검을 의뢰한 수사과 반장들은 '네가 얼마나 맞추는 지 보자'는 식으로 자세한 사건 정황을 알려주지 않았고, 검사들은 법의학자인 문국진을 범인 취조하듯 대했다. 법정에는 증인석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아 바로 옆에 서있는 살인 용의자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법의학자로서 받는 수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을 '두벌죽음'이라며 금기시했던 우리나라의 관습 때문에 현장에서 부검을 할라치면 아낙네의 부지깽이에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사건 현장에서 사과박스를 늘어놓고 부검을 하려던 문국진 옆에 갑자기 도끼가 떨어졌다. 손자를 아꼈던 피해자의 할아버지가 "손자를 두벌죽음 당하게 할 수 없다"고 문국진 박사를 도끼로 내려찍으려했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문국진 박사는 "국민이 반대하는 학문을 구태여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큰 회의감에 빠진다. 

결국 스승인 장기려 박사에게 찾아가 자신을 외과 의사로 받아 달라며 머리를 조아린 문국진. 하지만 제자가 법의학을 하는 것을 반대했던 스승 장기려 박사는 "힘들어도 한 우물만 파야한다"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스승의 엄한 꾸중에도 법의학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다시 법의학자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들이었다고 한다. 문국진이 법의학자의 길을 포기하기 직전, 그를 돌려세운 역사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담당사건만 약 2600건에 달했다. 문국진의 법의학자 인생 35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사인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주었던 문국진. 법의학자로 활동하는 동안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은 1968년 발생한 '한강 나루터 변사체 사건'이다. 피해자는 40대 여성으로 야간 학교를 다니는 딸을 마중 나가기 위해 매일같이 나루터에 왔던 인근 주민이었다. 사고가 난 당일, 통금시간이 다 되어도 딸이 오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음날 백사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녀의 턱, 유두, 음부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나있었고, 경찰은 근처 벽돌공사장의 인부 중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범행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문국진은 선명한 잇자국을 이상하게 여겼다. 흔한 정신이상자의 범행이라면 물리는 것을 피하다가 생긴 방어흔이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특히 치열은 지문과 같이 모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잇자국의 주인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공사장 인부 50여명의 치열을 대조해보아도 같은 잇자국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였을까. 법의학의 힘을 국민에게 알린 문국진의 빛나는 활약이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공개된다. 






ㆍ시신이 병원에 와야 검안 시작

ㆍ최초 현장 조사하면 다를 수도

ㆍ“부검뿐인 ‘반쪽 제도’ 보완을”


2010년 4월 인천의 한 모텔에서 발생한 일명 ‘산낙지 살인사건’은 지난 9월 대법원이 용의자였던 숨진 여성(당시 21세)의 남자친구 김모씨(32)에게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하면서 영구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게 됐다. 검찰은 보험금을 노린 김씨의 계획적인 살인으로 봤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근무하며 이 사건을 맡았던 전석훈씨(44)는 “사망 당시 최초 현장에서 법의학 전문가가 검안·부검을 했다면 판단이 달랐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검안은 시각적으로 사망·사고 원인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부검은 해부를 통해 사인을 밝히는 일이다. 이 사건의 사망 여성은 애초 경찰이 단순 질식사로 처리해 유족들이 화장을 했고 뒤늦게 타살 의혹이 제기됐다. 

한국의 법의학자들은 검안이나 부검에 대한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법의학자들은 변사자가 병원으로 옮겨진 뒤에야 볼 수 있고 경찰도 사망 사고 등 현장에서 이들을 거의 찾지 않는다. 민간 법의학 의원이 있지만, 부산·울산·대구와 서울 용산·동대문 등 전국에 5곳뿐이다. 

13년간 국과수에서 일하며 3000여차례 부검을 해온 전씨는 “법의학은 현장 검안과 부검의 두 축으로 이뤄진다고 배웠지만, ‘반쪽짜리 법의학’밖에 할 수 없는 우리 현실에 자괴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함께 근무했던 김형중씨(43)와 올해 국과수를 나와 지난 9월 서울 동대문구에 ‘한국법의학 서울의원’을 차렸다. 전씨 등은 경찰 요청 시 언제든 변사 현장에 출동할 수 있도록 365일 밤낮으로 대기한다.

전씨는 “시신에서 비전문가가 놓치기 쉬운 흔적은 많다. 법의학자가 현장에 나가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이 묻히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울산에서 계모 폭행으로 8세 여아가 숨졌을 당시, 지역 민간 법의학 전문가가 변사 현장에 검안을 나갔다. 계모는 “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지만, 법의학 의사의 검안과 부검 결과 오랜 시간에 걸친 학대 사실이 밝혀졌다. 타살이 아니더라도 보험 판정 등 문제 때문에 유족들이 질병·상해·산업재해 여부 등 정확한 사인을 알아야 할 경우도 많다. 

김씨는 “유족도 현장 검안의 중요성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소송 등 더 복잡한 방식으로 갈등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일본 등지에서는 검시법·법의관법이 마련돼 있으며 변사 현장에 무조건 법의학 전문가가 동행해 검안토록 하고 있다.

pee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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