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오현지 기자]'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를 통해 흥미로운 법의학 세계를 만난다. 문국진 명예교수는 미국에서의 경험담과 자신의 '법의탐적론'에 대해 말한다.

'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들 중 하나인 국내 제 1호 법의학자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난다.

20일 오전 7시 5분 방송되는 KBS 1TV 'TV 회고록 울림'에서는 문국진이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된다.

세계 법의학계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떠난 문국진 박사는 대활약을 펼쳤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문국진의 끝나지 않은 활약이 이어진다.

세계로 뻗어나간 법의학자 문국진, 그가 진단하는 한국 법의학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앞선 법의학 환경을 직접 보고 싶어 뉴욕 법의관 사무소에 간 문국진 박사.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정식 법의관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된 미국의 법의학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를 몸소 경험했다. 

검시권이 없어 현장 수색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국 법의관과 달리 미국 법의관은 변사체가 발생한 사건의 모든 수사과정을 책임지고 관리한다. 이런 권한은 단순히 제도로만 보장된 것이 아니다. 법의관 통제구역이 되어 길이 막히면 대통령도 그 길을 지나갈 수 없다. 법의관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있는 것이다.

뉴욕 법의관 사무소에 있는 동안 문국진 박사는 커다란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RH식 혈액형을 발견한 위너 박사와 함께 또 다른 혈액형분류법을 발견한 것. 두 사람은 혈액 응집소를 찾아낸 '누리장나무'의 학명을 따서 Cl혈액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혈액형은 침이나 정액으로도 알아낼 수 있어 DNA지문검사가 불가능했던 1970년대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고, 곧 국제학회에서 당당히 인정받을 만큼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세계적인 법의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법의학의 위상을 끌어올린 문국진 박사. 그가 바라보는 우리나라 법의관 제도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법의학계의 큰 스승 문국진은 해방 이후 최초의 법의학 교실을 설립했다.

법의관에 대한 박한 처우와 개선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후배 법의학자들은 계속해서 국과수를 떠났다. 이런 식으론 후진을 양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 문국진 박사는 대학에 법의학교실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접학문인 병리학회의 동의를 받아야했고 수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과목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부탁해야했다. 이런 다양한 노력 끝에 그가 학교로 온 지 6년이 지난 1976년,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문국진 박사는 법의학 교실을 상징하는 심벌을 만들면서 "People are flower…Be genlte(사람은 꽃이다. 부드럽게 대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법의학이 인간의 권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는 뜻이었다.

이런 문국진 박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법의학의 대들보가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경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밝힌 황적준 박사를 비롯한 문국진 박사의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 법의학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후학들을 양성하고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문국진 박사, 현재 법의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문국진 박사에 대한 후학들의 솔직한 고백이 'TV 회고록 울림'에서 공개 된다.

법의학자 문국진의 인생 이모작, 예술과 법의학의 만남 '법의탐적론'은 무엇일까.

문국진 박사는 법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으로 펴낸 법의학 교양서적 '새튼이'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어떤 추리소설보다 흥미롭고 생생한 문국진 박사의 경험담은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책이 인기를 얻을수록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법의학 교양서적이 대중들에게 법의학을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문국진 박사는 이후 '지상아' '배꼽의 미소' 등 다양한 법의학 교양서적을 출판했다.

은퇴 후에도 그의 연구, 집필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우연히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게 된 문국진 박사. 그는 법의학적인 시선에서 문헌, 사진자료 등을 분석해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분석한다. 그는 이렇게 문헌자료와 예술작품을 부검하듯이 파헤쳐 법의학적 사실을 입증해 내는 이 학문을 '법의탐적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젊은 날 법의학을 처음 접하고 심장이 뛰었듯, 새로운 학문과 또 한 번 사랑에 빠진 문국진 박사.

그가 알아낸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화가 모딜리아니가 유독 목을 길게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고야의 '옷 벗은 마하'의 모델은 정말 신분이 높은 귀족의 부인이었을까. 문국진 박사가 법의학적 추리로 밝혀낸 작품 속 진실이 'TV 회고록 울림'을 통해 밝혀진다.








[폴리뉴스 오현지 기자]'TV회고록 울림'에서 법의학자 문국진이 출연한다. 부검에 대한 반발이 있던 시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TV회고록 울림'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다룬다. 12일 방송되는 'TV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 문국진이 출연한다. 

13일 아침 7시 5분 'TV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 법의학의 태두 문국진 박사의 첫 번째 이야기가 공개된다. 

소나기가 만들어 준 인연, 법의학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다.

우산 없이 만난 소나기 때문에 급하게 들어간 헌 책방에서 '법의학 이야기'란 제목의 일본 책을 발견한 문국진. 당시 의과대학 3학년이었던 그는 ‘의학과 법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는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그 책은 대학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학문을 다루고 있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과 권리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임상의학이고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말이 후루하타 타네모토 저서 '법의학 이야기'에 적혀 있었다. 

책의 서문을 읽자마자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문국진. 마치 홀린 것처럼 그 책을 사와 밤새 읽고 또 읽었다.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옹호하는 의학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은 문국진은 난생 처음 본 학문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법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운 일본은 법의학이 발달했지만 해방 후 수교를 맺지 않아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는 상황. 스승을 찾아 밀항을 꿈꾸기도 했다는 그의 험난했던 법의학 개척기가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펼쳐진다. 
  
도끼에 맞아죽을 뻔한 법의학자 문국진, 그가 법의학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졸업 후 법의학자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문국진. 다행히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창설되면서 그는 정식으로 국내 최초의 법의학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제대로 된 부검실도 갖추지 못한 열악한 국과수 시설보다 그를 괴롭게 한 것은 법의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부검을 의뢰한 수사과 반장들은 '네가 얼마나 맞추는 지 보자'는 식으로 자세한 사건 정황을 알려주지 않았고, 검사들은 법의학자인 문국진을 범인 취조하듯 대했다. 법정에는 증인석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아 바로 옆에 서있는 살인 용의자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법의학자로서 받는 수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을 '두벌죽음'이라며 금기시했던 우리나라의 관습 때문에 현장에서 부검을 할라치면 아낙네의 부지깽이에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사건 현장에서 사과박스를 늘어놓고 부검을 하려던 문국진 옆에 갑자기 도끼가 떨어졌다. 손자를 아꼈던 피해자의 할아버지가 "손자를 두벌죽음 당하게 할 수 없다"고 문국진 박사를 도끼로 내려찍으려했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문국진 박사는 "국민이 반대하는 학문을 구태여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큰 회의감에 빠진다. 

결국 스승인 장기려 박사에게 찾아가 자신을 외과 의사로 받아 달라며 머리를 조아린 문국진. 하지만 제자가 법의학을 하는 것을 반대했던 스승 장기려 박사는 "힘들어도 한 우물만 파야한다"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스승의 엄한 꾸중에도 법의학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다시 법의학자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들이었다고 한다. 문국진이 법의학자의 길을 포기하기 직전, 그를 돌려세운 역사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담당사건만 약 2600건에 달했다. 문국진의 법의학자 인생 35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사인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주었던 문국진. 법의학자로 활동하는 동안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은 1968년 발생한 '한강 나루터 변사체 사건'이다. 피해자는 40대 여성으로 야간 학교를 다니는 딸을 마중 나가기 위해 매일같이 나루터에 왔던 인근 주민이었다. 사고가 난 당일, 통금시간이 다 되어도 딸이 오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음날 백사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녀의 턱, 유두, 음부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나있었고, 경찰은 근처 벽돌공사장의 인부 중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범행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문국진은 선명한 잇자국을 이상하게 여겼다. 흔한 정신이상자의 범행이라면 물리는 것을 피하다가 생긴 방어흔이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특히 치열은 지문과 같이 모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잇자국의 주인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공사장 인부 50여명의 치열을 대조해보아도 같은 잇자국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였을까. 법의학의 힘을 국민에게 알린 문국진의 빛나는 활약이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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