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6일 오후 9시 30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갑작스러운 한 통의 전화가 겨울밤 파출소의 한적함을 깨운다. 

“사…사람이 죽었어요. 도와주세요.” 신고인은 외국인이었다. 한국인 여자 친구 A(당시 24세)씨의 주검과 마주친 그는 떨고 있었다. A씨는 엎드린 채 숨져 있었다. 칼에 찔린 복부에서 난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자상의 크기는 1.7㎝로 작은 편이었지만 대동맥을 관통할 정도로 깊게 찔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첫 번째 칼부림은 바로 옆 탁자 아래에서 시작된 듯했다. 탁자 아래엔 비산(飛散·튀어 흩어짐) 혈흔과 적하(滴下·방울져 떨어짐) 혈흔이 섞여 있었다. A씨의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칼로 배를 공격한 후 범인은 확인사살을 하듯 A씨의 목을 다시 누른 것이다. 방어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범행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피해자는 반항 한번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찢어진 장부… 과학이 뒷장을 드러내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일반 주택 2층을 개조해 만든 옷 도매가게였다. 주로 아프리카 쪽 바이어를 상대하는 매장은 흔한 입간판 하나 없어 일반인은 전혀 상점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탁자엔 바로 전까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듯 음료수 캔과 비스킷, 거래장부가 놓여 있었다. 선풍기형 난로도 탁자를 향해 있었다. 피해자의 가방과 지갑은 모두 열려 있었고 책상서랍 안에 있던 260만원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문이나 창에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 경찰은 손님을 가장한 강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범인이 외국인이라면 수사 과정에서 곤란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한국 경찰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꼽히는 지문 자동검색 시스템(AFIS)을 이용할 수 없다. 불법 체류자라면 소재 파악도 쉽지 않다. 그렇게 고민만 깊어갈 즈음 지문 감식을 위해 거래 장부를 조사하던 수사관이 의문을 제기했다.

“반장님, 장부 한 장이 비는데요. 5일 자가 없어요.”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앞장의 글자와 뒷장에 남아 있는 자국이 좀 달라 보인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흔적이 남은 장부를 찢어버린 것이라는 판단에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필흔(筆痕) 재생을 의뢰했다. 

필흔 재생이란 볼펜이나 연필 등 필기구를 사용할 때 원본 뒤 종이의 눌린 자국을 통해 앞장의 글자를 복원하는 작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쓰면 필기구의 압력이 종이 뒷장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글씨를 쓴 사람이 펜을 얼마나 힘껏 눌렀는지, 필기구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음, 그다음 장까지도 필흔이 남을 수 있다. 통상 볼펜이나 연필은 원본 뒤 셋째 장까지 자국이 남는다. 하지만 사인펜으로 쓴 글씨는 다음 장에서도 흔적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사실 자국이라고 말하지만 육안이나 현미경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정도여서 이를 확인하는 데는 고가(3000만원가량)의 특수장비가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주로 영국제 ‘ESDA2’가 쓰인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증거물(눌린 종이)을 기계에 넣은 후 그 위에 랩과 같은 특수필름을 평평하게 깐다. 진공상태에서 기계가 정전기를 발생시키면 필름에는 자연스럽게 글자 모양에 따라 요철이 생긴다. 필름을 15~20도 정도 기울인 상태에서 특수 처리된 흑연가루를 뿌려주면 필름 위에 앞장에 썼던 글자들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국과수가 복원한 페이지는 ‘제이’(Jay)라는 손님의 거래 내역서였다. 티셔츠와 바지, 점퍼 등 도합 640만원어치의 물품을 제이가 주문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수사팀 입장에서 뜻밖의 횡재는 제이의 전화번호였다. 01×-8××-××××.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제이를 찾아 나섰다.

●장부 속 고객 ‘제이’를 잡아라

휴대전화 개통자는 나이지리아인 저스틴(당시 31세)이었다. 이태원 나이지리아인 밀집 지역을 탐문 조사한 결과 장부 속 제이는 저스틴과 동일 인물이었다. 제이란 이름은 위조 여권 속 가명이었다. 

범인은 불안한 듯했다. 사건 뒤 저스틴의 휴대전화 신호는 이태원 녹사평역에 나타났다가 다시 한남동과 경기 동두천시로 옮겨갔다. 마지막 위치는 나이지리아인 밀집 지역인 안산시의 주택가로 확인됐다.

영장도 없는 상태에서 드넓은 주택가를 모두 뒤질 수는 없는 노릇. 특히 나이지리아인 지역 사회에 잘못 들이닥치면 오히려 경찰이 떴다는 것을 저스틴에게 알려주는 꼴이 될 게 뻔했다. 경찰은 비용 때문에 휴대전화보다는 공중전화를 자주 이용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전화 이용 유형에 착안했다. 인근 공중전화 10군데를 골라 잠복에 나섰다. 그렇게 한 지 3일. 저스틴은 전화를 걸고 나오다 공중전화 앞에서 검거됐다.

저스틴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굳게 닫았다. 하지만 범행을 부인하기에는 증거나 정황이 너무나 분명했다. 우선 현장에 남은 음료수 캔의 지문이 그의 것과 일치했다. 특히 자취방에서 찾아낸 비닐봉지에서 숨진 A씨의 혈흔이 발견되자 그는 죄를 벗기 위한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저스틴은 범행을 저지르기 14개월 전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비자 유효 기간이 만료돼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 일자리 찾기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막막해지자 그는 범행을 결심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곳은 전에 친구와 들렀던 A씨의 가게였다. 인적이 뜸한 데다 여자들만 있어 강도를 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저스틴은 자신을 나이지리아에서 온 바이어라고 속이고 범행 전날인 12월 5일 옷가게에 들렀다. 모처럼 온 큰 손님에 반가워하며 A씨가 장부를 적어 나가는 동안 그는 내부구조와 현금의 위치, 도주 경로 등을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범행에 쓸 과도도 구입했다. 범행 당일인 6일, A씨가 3시간에 걸쳐 옷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저스틴은 칼을 쓸 타이밍을 노렸다. 그리고 무참하게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 가게를 나오는 순간 저스틴의 머리에 불안이 엄습했다. 자기의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장부가 떠올랐다. 

그는 장부의 마지막 장을 깔끔히 찢어내는 용의주도함으로 범행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은 끝내 그를 스스로 옭아매는 증거가 됐다. 불안은 그렇게 범인의 영혼을 잠식했다.



whoami@seoul.co.kr







(뉴스1)이상길 기자 = 사실 '에이즈(AIDS)'란 병은 미심쩍은 구석이 조금 있다. 실제로 에이즈와 관련해서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비록 소수지만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에이즈는 일종의 '가설'일 뿐이라고 한다. 

그게 왜 그런가 하니 보통 어떤 질병을 의학적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질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존재해야 한다. 소위 '병원체'라고 부른다. 

하지만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는 여태 한 번도 추출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니 학자들 중에 에이즈 바이러스를 현미경으로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에이즈는 진단 시 늘 '양성'이란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다시 말해 HIV양성반응은 혈액을 채취해 혈액 안에 HIV가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혈액 속에 'CD4'로 분류되는 T세포(면역을 담당하는 세포) 수치를 보고 판단한다. 

더 이상한 건 그 기준이란 게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 보통 혈액 속의 T세포 수치는 영양상태 등 여타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어 정부에서 정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이는 곧 가난한 아프리카 어느 국가에서는 음성이지만 미국에서는 양성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상은 <에이즈 가설의 저편 너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근거로 소수의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다. 

며칠 전 열렸던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인공 '매튜 맥커너히'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겼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배우들의 연기나 작품성을 떠나 앞서 음모론자들의 이야기처럼 우선 영화 속 핵심소재인 '에이즈'란 병의 진실과 관련해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십 수 년 전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알게 된 에이즈란 병의 실제 모습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에이즈는 치사율 100%의 암보다 더 저주받은 병으로 알려지면서 지구촌을 온통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 사는 론(매튜 맥커너히)은 전형적인 카우보이다. 실제로 그는 로데오 경기를 즐기고, 술과 섹스, 도박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는 '탕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몸은 이유없이 말라갔고, 작업 도중 쓰러져 가게 된 병원에서 HIV양성 판정과 함께 30일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론은 이후 'AZT'라는 치료약이 임상실험 단계에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간호사를 매수해 약을 빼내 복용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다. 

진단 후 30일이 다 되어가자 론은 점점 절망하게 되고 지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통해 이웃나라 멕시코로 건너가 치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론의 상태는 호전된다. 더욱 놀라운 건 그곳 의사의 처방은 'AZT'가 아닌 단백질이나 비타민, 아연, 필수지방산, 알로에 등의 인체면역력을 높이는 식약품들이었던 것. 

그곳 의사의 말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AZT가 에이즈를 낫게 하는 게 아니냐"는 론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AZT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그걸 파는 놈들뿐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태를 호전시킨 약품들은 모두 미국 내에서는 FDA(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지 못해 유통이 불가했다. 

결국 론은 몰래 멕시코에서 그 약품들을 밀수해 들여오기 시작하고, 회원제로 운영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만들어 에이즈 환자들에게 팔기 시작한다. 


'톰 행크스' 주연의 1993년작 <필라델피아> 등 그 동안 에이즈 환자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제법 있었지만 앞서 음모론자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최초가 아닐까 싶다. 

기존의 에이즈 소재 영화들은 대부분 에이즈 환자들이 사회로부터 겪을 수밖에 없는 불편한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 

영화 속에서 병원 측으로부터 30일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론은 실존인물로 그는 AZT를 거부한 덕택에 진단 후에도 무려 7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아니, 정부의 AZT 강요에 맞섰던 론의 용감한 행동은 복합처방법으로 개발돼 이후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의 목숨을 연장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농구스타 '매직 존슨'도 1991년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살아있다. 

왠지 터무니없어 보이는 에이즈 음모론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이 영화로 힘을 받는 까닭이다. 


적어도 에이즈가 치사율 100%로 암보다 더 저주받은 병이란 건 이제 지나치게 과장된 이야기임이 분명해 보인다. 

공포는 쉽게 전염된다. 조금만 과장해도 공포는 생산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쉽게 혼돈에 빠뜨린다. 

그런데 사업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면 공포는 사람들의 지갑을 쉽게 여는 힘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입한 뒤 쉽게 돈을 벌려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미국 FDA와 제약회사라는 거대 권력에 맞서 싸웠던 '로날드 우드로프'의 실화를 그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우선은 사회성 짙은 저항영화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수상한 권력에 대한 투쟁기가 전부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HIV양성 판정 이후 론의 행적을 조용히 담아내면서 삶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론의 모습이 더욱 빛나는 영화다. 

론이 자신처럼 FDA에 반기를 든 의사 이브(제니퍼 가너)에게 말한다. 


"인생을 좀 즐겨. 한번 밖에 없잖아."

론이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회원제 클럽을 운영하며 공권력에 맞설 수 있었던 것도, 평소 경멸했던 게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동료 레이언(자레드 레토)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누구든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마침내 영화는 카우보이 론이 평소 좋아했던 로데오 경기에 다시 참가해 미쳐 날뛰는 소를 타고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는 모든 카우보이는 어차피 소에서 떨어질 걸 각오해야 한다. 

원래 로데오란 게 미쳐 날뛰는 소 위에서 몇 초라도 더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다. 다만 소를 타고 추는 춤이 좀 더 멋지길 바랄 뿐이다. 

삶이란 것도 그렇다. 굳이 에이즈가 아니라도 모든 삶은 언젠가 반드시 막을 내리기 마련이다. 그걸 생각하면 사는 게 가끔 힘겨워도 론의 말처럼 인생을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6일 개봉. 러닝타임 1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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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28일 오전 10시 대전 대덕산업단지의 북쪽 끝 2차선 도로. 일요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마트로 향하던 외국인 노동자 자하드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듯 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건물 한쪽 벽면을 살펴보니 젊은 여성이 대형 트럭과 담벼락 사이에 잠자듯 누워 있었다. “술에 취한 여자인가?” 급하게 여성에게 다가간 자하드. 소스라치게 놀랐다.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양쪽 발목이 흰색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이 가련한 젊은 여성의 목숨을 끊은 뒤 이곳에 버린 것이었다.

●입만 막은 여성이 질식사하다?

시신은 깨끗했다. 앳된 얼굴의 피살자는 줄무늬 블라우스에 베스트,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듯한 옷매무새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사회 초년생의 느낌. 코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광대뼈와 왼쪽 턱에도 작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치명상은 아니었다. 혈흔도 찾을 수 없었다. 여성 피살자들에게 통상 발견되는 목졸림의 흔적 또한 없었다(부검의들에 따르면 살해당한 여성의 90%가 목 졸려 죽는다. 힘이 약한 여성에게 쓰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범행 현장이 여기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은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시반(屍斑·시신의 피부에 나타나는 자주색 반점)은 몸 앞쪽에 나 있었다.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얘기. 정액반응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남성의 타액이 발견됐다.

부검 결과 사인은 비구(鼻口) 폐쇄성 질식사였다. 입가에 테이프 자국이 있는 걸 봐서는 이것이 죽음의 원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테이프가 코는 빼고 입만 막고 있었는데 왜 질식사를 한 걸까. 해답은 사망 당시의 자세에 있었다. 사람을 납치하면 범인들은 보통 끈을 풀지 못하도록 손을 등 뒤로 묶고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입을 막는다. 때론 팔을 묶은 끈으로 다리까지 묶기도 한다.

팔이 뒤로 꺾인 자세가 오래 지속되면 심장박동이 크게 떨어진다. 법의학자들은 이 자세로 오래 방치할 경우 코나 입 어느 하나만으로 숨쉬는 것이 어려워 질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피해 여성은 코에서 난 피가 비강을 막은 게 분명했다.

지문조회 결과 사망자는 충북 청주에 사는 24세 A씨였다. 가족들은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출신고를 한 상태였다. A씨가 죽은 채 발견되기 이틀 전인 26일(금요일) 저녁 청주 남문로에서 회식을 한 뒤 택시를 탄 게 화근이었다. 대학 졸업 후 무수한 입사 도전 끝에 직장에 취직하기 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출근 첫째주 휴일을 앞두고 마련된 그녀를 위한 환영 회식이었다. 범인은 그렇게 막 피어나던 꽃망울을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범인, 과실치사 적용받으려 술수

형사들은 시신 발견 지점 주변의 폐쇄회로(CC)TV 확인에 나섰다. 먼저 확보한 것은 A씨가 버려진 빌딩 담 위쪽에 설치된 CCTV 화면. 발견 전날인 27일 토요일 저녁 녹화분부터 확인했다. 후미진 곳이긴 해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인데 시신이 며칠 동안이나 방치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성과 없이 이어지는 CCTV 화면 탐색에 형사들이 조금씩 지쳐갈 즈음이었다. 모니터의 시간이 오전 1시 30분을 가리키는 순간, 퉁퉁한 체격의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트렁크를 열었다. 뭔가를 급히 꺼냈다. 이미 숨져 있는 A씨였다. 남자는 트럭 옆에 A씨를 버린 뒤 황급히 차를 몰고 떠났다.

화면이 너무 흐려 차량번호는커녕 범인의 이목구비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종이 흰색 NF쏘나타임은 분명했다. 더 큰 수확은 차 지붕에 택시표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A씨가 회식을 마치고 탑승한 택시에 대한 수배에 나섰다.

경찰은 CCTV 속 범인이 시신을 유기한 후 다시 청주로 돌아갔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 과정에 반드시 거쳐 갈 수 밖에 없는 노루목을 찾아야 했다. 경찰이 짚은 지점은 현도교. 대전 대덕단지에서 신탄진 나들목(IC)을 거쳐 청주로 넘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CCTV도 설치돼 있었다.

범행 당일 오전 1시 30분 이후 다리를 지나간 택시의 수는 모두 67대였다. 경찰은 이중 유독 수상해 보이는 1대에 주목했다. 차 번호를 숨기려 번호판에 반사테이프를 붙인 택시였다. 게다가 앞서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흰색 NF쏘나타였다. CCTV 화면을 정밀 분석해 알아낸 차량번호는 충북××바××××. 경찰은 청주의 한 택시회사로 형사들을 급파했다.

“CCTV에 다 찍혀 있다.”

형사들의 말에 택시기사 안모(41)씨는 순순히 자기 집에서 수갑을 받았다. 자하드의 112 신고가 접수된 지 12시간 만이었다. 택시 운전석 문짝에서는 식칼이, 트렁크 매트에서는 혈흔이 나왔다. 혈흔은 숨진 A씨의 것과 일치했다. A씨를 위협해 빼앗은 7000원도 함께 나왔다. 범인은 “테이프로 입만 막았기 때문에 A씨가 숨은 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성폭행 등 성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미 2000년에 감금 및 성폭력 혐의로 3년형을 받고 복역했던 그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놓고도 어떻게 하면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만 적용받을까 갖은 술수를 쓰고 있었다.

●잔혹한 살인자…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연기군 조천변 살인사건 있잖아요. 이번에 나온 DNA가 그 사건 용의자와 일치해요.”

수사팀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안씨의 과거 범행이 칡넝쿨처럼 이어져 나왔다. 택시기사를 하며 6년간 살해한 여성이 3명이나 됐다. 2004년 10월 충남 연기군 전동면 조천변 도로에서 발견된 B(당시 23세)씨도, 2009년 9월 청주시 무심천 장평교 아래 하천가에 숨져 있던 C(당시 41세)씨도 그의 손에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출소 후 안씨는 그렇게 늦은 밤 택시에 탄 여성을 상대로 살인과 강간, 강도 등의 범행을 이어갔다. 대부분 몸집이 작거나 술을 마신 사람들이었다. 지난해 10월 대전지법 형사합의11부는 안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고의성을 부인하고, 끊임없이 진술을 번복하는 등 진지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겪은 고통 등을 고려해 극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 설치된 CCTV는 총 274만대로 추정된다. 공공용 24만대, 민간용 250만대다. 현재 CCTV는 인권침해와 범죄예방 효과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사건에서는 CCTV가 자칫 미제사건으로 묻힐 뻔 했던 억울한 죽음들의 한을 풀어준 것과 동시에 추가적인 희생자를 막는 효과를 냈다. 우리사회의 ‘은밀한 감시자’인 CCTV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는가.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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